철학은 죽음의 연습이고, 죽음은 철학의 완성이다. - 플라톤
님의 죽음, 라이따이의 의미
님(싸와니 우툼마)의 죽음은 터부에 순응한 결과이다. 바얀신은 종족이 지켜야 하는 신성하면서도 두려운 터부. 종족을 어떻게 지켜주는지 그 권능이 입증된 바는 적어도 스크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영화 끝까지 어떠한 능력도 드러내지 않는 무능한 바얀신의 참수된 모습은 흔들리는 기존의 사회규범(터부)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님의 죽음은 터부에 대한 무저항, 무사유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님은 퇴마의식 전날까지도 바얀신(터부)에 대해 의심한다. 하지만 그녀는 엘리야 선지자처럼 신을 시험하지도 않았고, 야곱처럼 천사와 씨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의심의 싹을 실천으로 발화시키지 않는다. 적어도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하면 알고 행하지 않는 것이 단순한 무지보다 더 나쁘다.
그녀는 터부에 짓눌려도 꿈쩍하지 않고 참아내는 노예이다. 노이(씨라니 얀키띠칸)가 시킨 심부름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형부의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을의 토템인 개가 죽어 있지만,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밍(나릴야 군몽콘켓)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어떤 귀신이 밍에게 빙의되었는지 제대로 맞힌 적이 한 번도 없다. ‘님’은 <곡성>의 ‘종수’처럼 사고체계가 모호한 인물. 끊임없이 휘둘리고, 위험한 순간에 명민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님은 전통 관습을 의심하되, 이를 재고할 의지가 박약한 인류를 대표한다. 그녀는 그저 권능을 상실한 터부를 신으로 인정하고 순응했다. 그 안에 인간다움의 요소는 찾아볼 수 없고, 그런 미개한 인간은 또 다른 터부와의 대격전에 참여할 자격 자체가 없다. 그게 바로 그녀가 어떠한 저항의 흔적도 없는 불경한 라이따이의 형태로 죽은 이유이다.
참수당한 바얀신
터부는 인간의 원시적인 두려움을 동력으로 삼되 숭배와 기피의 두 형태로 인류사에 드러난다. 기독교의 신이 근엄한 심판자로서의 부성(구약)과 따뜻한 사랑의 모성(신약)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도 터부를 공고화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두 모습 모두에서 신은 권능을 드러낸다는 점. 따라서 공포의 신도, 자비의 신도 모두 경배할만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선하다는 것은 능력을 내포한다. 누군가 힘이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힘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신의 필수 기능은 치유와 구원이고 구원은 초자연적인 힘이다.
신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신의 카리스마도 소멸한다. 터부가 터부로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터부는 폐기된다. 터부의 본질은 그 사회적 효용에 있기 때문이다. 터부는 문명사회 이전에 있는 문화적 강제력이자 인간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부과한 의무이다. 따라서 터부가 부족을 강제할 힘을 잃는다면, 그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개고기를 파는 노이
바얀신의 죽음은 기존 터부가 무너졌다는 뜻. 그 중심에는 개고기 판매가 있다.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노이 일가가 개고기를 파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이가 바얀신을 거부한 것과 개고기를 판매하는 것은 영화 구도의 주요한 설정. 바얀신은 개로 묘사되진 않지만, 그 부족이 개를 보호하고 아끼는 것은 기정사실. 태국은 개 사랑이 유별나다. 왕실견 ‘통댕’을 욕한 남자는 37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노이는 그런 개를 음식으로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노이는 터부를 평범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인물(노아의 어원이 ‘평범한 자’인 것은 단지 우연일까?). 자신에게 강요된 터부(신성)를 거부하고 터부를 노멀한 세계로 끌어내린다. 그리고 원시와 미개를 파괴하기 위해 이성과 논리를 활용한다. 귀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자연을 끌어내린다. 그녀는 개고기를 판매하는 근거를 유비추리를 통해 입증한다. “금붕어를 키우면서 생선을 먹는 게 정당한데, 개를 키우면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왜 안 되는가?”라고. 그렇게 터부는 평범한(합리적 경제인) 노이의 이성과 논리에 의해 파기된다.
밍이 선택받은 이유
밍은 새로운 터부를 상징한다. 기존의 터부를 전복하기에 충분한 파괴적인 신들의 대변자이다. 밍이 그런 새로운 귀신의 선택을 받는 이유는 밍 역시 터부를 깨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저항하고, 억압된 종교 행위인 천주교 미사를 소홀히 여기고, 모계사회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근친상간을 저지른다. 밍과 멕의 동침은 밍이 기존 터부의 파괴자임을 의미한다.
밍이 노이를 죽이는 이유
밍이 노이를 죽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꽤 중요하다. <랑종>의 세계관에서 밍에게 빙의된 파괴적인 신들은 빙의되지 않은 것은 죽이지만, 빙의된 것은 죽이지 않는다. 그런데 밍은 빙의된 노이를 목졸라 죽인다. 왜 굳이 밍은 노이에게 위해를 가했는가?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개고기를 팔아서라도, 자신이 퇴마 요법을 대행해서라도 밍을 구하고 싶었던 노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이 또한 접신(接神)했는데, 다른 접신한 이들과 달리 밍이 유독 노이만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노이가 인간적 재치로 신을 피해가려는 과학주의적 인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의 교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노이는 ‘이 차는 빨간색이다’, 라는 속임수를 쓰고, 자신의 속옷을 동생에게 전가하여 신을 속인다. 재치 있는 말솜씨로 개고기 판매를 정당화한다. 근대인 노이. 밍이 노이를 죽이는 것은 과학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과학이 하나의 부분학으로서의 경계를 넘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태에 천벌을 내리는 것이다.
터부는 운명이 아니다
새로운 질서와 권력을 상징하는 ‘밍’. 밍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묘사된 까닭은 새로운 터부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기피’ 경향 때문이다. 기존의 터부를 몰아낸 터부 또한 그 근거는 박약하나, 터부는 두려움을 먹이로 성장하는 법.
밍과 그 수하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드러낸 장면은 없다는 것에 주목하라. 물론 그들이 식인하는 모습은 수차례 묘사되고,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도 카메라맨을 비롯한 빙의되지 않은 자들은 새로운 귀신(터부)에 지레 겁먹고 알아서 자신의 내장을 내어준다. 공포에 잠식된 인간이 제 능력을 잃고 주체적인 사고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유린당하는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두려워했기에 터부가 신 노릇을 할 수 있었을 뿐, 우리가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간 귀신의 권능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터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마지막까지도 터부는 스스로가 얼마나 연약한지 드러내지 않는가. 자칭 신이라는 것들이 부적 몇 개 달린 문 하나 제대로 열지 못하고, 인간이 만든 허술한 속임수에 넘어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의심을 전파하는 일. 하지만 귀신의 별 거 아닌 이간질과 별 볼 일 없는 물리력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질린 인간은 투쟁 의지를 잃는다. 속고 또 속는다. 그렇게 터부는 마음대로 인간을 지배할 힘을 얻게 된다.
우리는 인간, 세상, 문화, 특히 ‘금기된 터부’를 보편적인 가치의 잣대로 바라보고 공론장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터부에 마주하여 금기된 것을 해체하고, 이 또한 별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인간은 문 하나 열지 못하는 귀신, 아니 터부 따위에게 잡아먹힐 정도로 약하지 않다. 그래서 <곡성>도 <랑종>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래의 문구를 바로잡아야 한다.
‘의심하지 마라’, 를 ‘끊임없이 의심하라.’로.
에필로그 – 현실과 상상의 균형
이제는 서양식 엑소시즘이 한계를 맞았다고 느낀 탓일까, 아니면 곡성의 획기적인 성공에 감응했기 때문일까, 최근 몇 년간 오컬트 영화의 중심 소재는 ‘동아시아와 주술’이었다. <곡성(2016), 사바하(2019), 제8일의 밤(2021), 데스 오브 미(2021), <랑종>(2021), 지옥(2021)>. 일정한 시기에 특정 소재가 반복되는 이유가 뭘까.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에 각개의 금융투자 액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코인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그래프가 판단의 기준이 되고, 통계가 세상 모든 걸 설명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살률은 높아졌고, 행복 지수도 낮아졌다.
코로나19는 과학의 힘에 의문을 던지게 했고, 미국을 강타한 토네이도는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실감케 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방송과 유튜브에 지친 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즘 대세는 4차 산업 시대와 프로그래밍이고 결정론과 과학주의다. 그리고 이들의 근본에는 ‘이성과 논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였다. Physics 옆에는 meta-physics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과학은 유용하고 논리는 옳지만, 그 자체로 충분할 수 없다. 과학은 총체적인 설명이 아니다. 과학은 그 용어부터가 분리(科)를 전제하지 않는가.
공산주의의 실패가 증명되었듯이, 실증주의와 분석철학의 모태인 과학주의 역시 인간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 나사의 과학자가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는 것과 탁월한 프로그래머가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지구를 위협하는 소행성은 폭발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히스 레저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요는 ‘이성주의, 논리실증주의, 과학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그 위세를 떨칠수록, 역설적이지만 ‘초자연과 미신과 주술과 신화’를 요청하는 게 인류사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충돌은 종식되지 않으리라 전망한 헌팅턴에게 갈채를 보낸다.
과학은 부분적으로만 참이고, 인간은 전체적인 구원을 희구한다.
초월을 향한 열망에서 비롯된 터부는, 새로운 터부를 만들어 내고, 그 터부가 이성과 논리에 의해 대체되면 또 다른 터부를 만들어(혹은 재해석하여) 낸다. 분트는 “터부를 범한 자는 터부가 된다.”, 라고 말했다. 그 순환고리가 무한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과학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간이 논의해야 할 부분을 프로그램과 결정론에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년에 이런 말을 했나 보다.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칸트는 진, 선, 미가 최소한 동급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전체적으로 삶을 실현하고, 총체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두 발을 땅에 딛되, 그 여백을 충분히 사유해야 한다. <랑종>을 보고 난 후 괴기하고 찝찝한 감정을 피하기는 어렵지만, 기존의 것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길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꽤나 극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이 세계의 우발성은 과학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밍이 카메라를 들어 주객의 시점을 전환한 것이, 지금의 터부 순응적 모습, <~nism>에 빠져 허우적대는 현실에서 벗어나라는 말로 해석한다면, <랑종>이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