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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Feb 27. 2022

[4] 모든 것을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가브리엘은 자신의 존재론을 ‘의미장 존재론’으로 칭한다. 이원론의 중간에 서 있는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충분한 사유 훈련을 필요로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이원론의 그늘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여하튼 ‘의미장 존재론’은 두 극단의 중간에 서있다. 주관적 구성주의와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사이 그 어딘가에서 가브리엘의 ‘의미장 존재론’은 나름의 ‘도덕 상대주의 극복’을 시도한다.




15p. 인용 및 재구성

새로운 리얼리즘(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의미장 존재론)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를 어떻게 이끌어 내는지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볼까 한다. 지금 아스트리드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소렌토에서 베수비오 화산을 바라보고 있고, 공교롭게 나는 나폴리에서 베수비오 화산을 구경한다. 그러니까 이 시나리오에는


 1. 베수비오 화산 자체와(사실 자체)

 2. 아스트리드가 본 베수비오(너의 구성)

 3. 내가 바라본 베수비오(나의 구성)


가 있는 셈이다. 형이상학은(플라톤 선의 이데아 같은 류의) 이 시나리오에서 단 하나의 진짜 대상, 곧 1번만이 (참으로) 있다고 주장한다(플라톤에 의하면 진짜로 있는 것은 가변적인 현실이 아닌 이데아 세계에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대아론은 현대 사회에서 힘을 잃고 있다). 하나의 동일한 화산을 우연히 한 번은 소렌토에서, 다른 한 번은 나폴리에서 본 것일 뿐, 화산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형이상학, 즉 1번 만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반대로 구성주의는 이 시나리오에서 2,3번이 (구성적으로) 있다고 전제한다.


끝으로 (가브리엘이 주장하는) 신실재론은 1,2,3번이 모두 있다고 가정한다.



 

 구성주의는 ‘나와 당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할 수 없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나의 기분, 지적 수준, 감각, 호르몬, 유전자, 소속, 문화적 특수성, 지향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을 본다는 입장이다. 더 말하면 입 아프지만 개는 색맹이고, 인간은 가시광선에 의한 것만 시각적으로 인식하며, 박쥐는 초음파로 사물을 본다. 인간 종이라고 같은 인식을 하는 것도 아니다. 따뜻한 봄날 아침 누구나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팬이지만, 누군가는 그딴 소설에는 하등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그냥 너는 너대로 살아라. 너의 취향을 존중한다.’로 퉁치며 (과학적이지 않은 영역에서) 인간의 교류에 관한 것들에 대해 에포케(판단 중지)의 태도를 견지하기 시작했다. 즉 과학 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사실성(fact)을 포기한 것이다. 반대로 과학에는 과도한 진실성을 부여한다. 물론 이는 과학주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폐해이다.

 그리고 그 파생물이 도덕 상대주의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아이디어대로 2,3번도 존재하지만, 1번 존재한다면, 도덕 상대주의에 반격을 가할 보편적인 도덕(1번과 같은 도덕적 가치 자체)에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이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1장:세계라니, 대체 그게 무엇인가?

 신실재론은 1,2,3, 모두가 있다고 주장한다.


 2장:존재란 무엇인가

 2,3(각자의 구성적인 세계)이 없다고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슈퍼 대상(일자, 선의 이데아, 태극 등)이 생기면 나머지의 것들은 부차적인 산물에 불과해진다. 그렇다면 2,3의 등급은 1보다 떨어지게 된다. 진짜 original가 아닌 모방 mimesis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브리엘은 형이상학적 실체, 제1의 원동자만을 인정하는 존재론을 비판해야만 한다.(가브리엘은 데카르트를 필두로 한 이원론 역시 양자의 연결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3장: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나 ‘니체의 힘에의 의지’ 등으로 이루어진 절대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슈퍼 생각이라고 규정하고,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볼 때 전체를 일관되게 기술하는 절대 형이상학(도가의 도, 성리학의 태극,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각종 절대신)을 비판하는 가브리엘의 주장과 보편적인 도덕 원리를 확보하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이는 추후에 다루겠다.>


 4장: 자연과학의 세계관

 이 장에서 가브리엘은 1의 시나리오(그 자체로 존재하는, 혹은 보편적인 도덕 원리 등)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성주의 절대주의를 비판한다. 주로 다루는 구성주의 이론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뇌가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뇌 환원주의


뇌에서 유발한 생각, 의지, 감정 등이 물질적(가시적)인 FMRI 등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 신경중심주의 이다.

 (신경 중심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차피 물질에 불과한 뇌의 구조를 파악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나 초월 욕구나 사랑과 희생 등의 비물질적인 것들의 인과성을 밝힐 수 있고, 따라서 이를 통해 신경의 자극과 호르몬으로 인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필자 생각에 이 부분은 참 흥미롭다. 현대의 많은 이들이 ‘뇌 신앙’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저서 “나는 뇌가 아니다”에서 더 다루겠다.


5장: 종교의 의미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1,2,3이 모두 존재하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브리엘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 영감을 받았다) 다원론은 쉽게 개념화되지 않으므로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왜냐하면 1,2,3을 모두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되면 절대적이고 유일한 대상(유일신)을 상정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의 단일화된 형이상학 원리를 맹종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불완전성과 직면해야 하는 다원론으로서의 신실재론’ 은 인간의 불완전성한 능력만으로 무한을 찾되, 결코 포기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하여, 신실재론자인 가브리엘이 바라보는 종교는 <무한성을 향한 의지와 모험>이라는 일종의 ‘초월을 향한 의지’로 규정된다.

 정리하면, 그가 생각하는 종교 또한 ‘미완성 체계를 전제한 끊임없는 분투’ 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러한 종교관이 철학의 정신에 상당히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6장: 예술의 의미

  이 장에서는 예술과 미를 빗대어 1,2,3이 모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의미장(세계)으로서의 신실재론을 설명한다.

 재차 말하지만,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그 모습이 개념적으로 파악되기 어렵다. 우리의 이성은 peras, 즉 자르고 구분하는 능력으로 발달되어 있으므로, 다양한 것들이 겹겹이 중첩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구성주의처럼 ‘진리는 없다는 유명론’을  취하거나 절대 형이상학처럼 ‘슈퍼 대상을 설정한 후 모든 것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게 우리에게 더욱 편리하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그 길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여하튼 위와 같은 상황 때문에 가브리엘은 그의 존재론을 빗대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예술에 빗대어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참고로 가브리엘이 비판받는 부분은 구성주의 비판도 정당하고, 절대 형이상학 비판도 다 정당한데, 이를 공존케 하는 의미장 이론의 적극적 근거가 범박하다는 것이다. 예술에 빗댈 순 있는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가브리엘은 1번도 인정하니까) 하나만 증명해 보라는 질문에 가브리엘은 쉽게 답하지 못한다.


7장: 무한함을 향한 감각의 긴 여행

 필자는 이 부분이 5장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3번째 파트인 ‘인생의 의미는’ 은 인문학의 정신을 상기시켜준다. 꼭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결국 가브리엘이 말하는 것에서 주목할 점은 현대의 과학주의적 사조에 대한 비판이다. 현대 과학주의의 사조는 “사실은 과학에만 있으니, 인문사회 영역에서 사실성을 추구하지 말라” 는 것이다. 실제로 진리에 갈급한 사람이 전공이 아님에도 홀로 수학 문제를 푸는 취미가 있다. 이는 인문사회에서 사라진 사실성과 보편성에 대한 희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가브리엘이 경고하는 것은 과학이 능력 이상의 명예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과학적 사고(가설-실험-입증)에서 비롯된 사실성은 그 범위가 제한적이고, 그 엄밀성도 절대적이지 않음에도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는 것이다.


 가브리엘의 의미장 세계에서는 무수히 많은 동급의 세계가 중첩되고 공존한다. 이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론의 업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관점과 인문의 관점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인문 세계에서의 현상도 과학적 사실에 맞먹는 가치를 지니며, 과학적 사실도 인문적 해석만큼이나 오류가 발생한다.


 


가브리엘의 한계, 추가 설명 필요한 부분


 첫째, 과학주의가 오류가 많고, 과학에 대한 맹신이 인문적 현상을 비사실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됐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을 동급으로 보기에는 논거가 부족하다.


 둘째, 가브리엘의 아이디어를 통해 1,2,3이 모두 존재한다면 구성된 도덕관과 실체로서의 도덕관이 양립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것을 우위에 두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그 의미장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그렇다면 신실재론을 통해 수립한 보편 도덕은 당위성을 지닐 수 있을까?

 가브리엘은 이런 비판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다음의 책을 쓴다. <나는 뇌가 아니다>라는 책을.



*가브리엘에 관한, 혹은 상대주의 극복에 대한 아이디어를 환영합니다. 댓글 주시면 숙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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