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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Mar 01. 2022

[5] 나는 뇌가 아니다 -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뇌 환원주의’와 ‘신경 중심주의’ 비판

 

 

 과학의 선봉장 미국은 부시의 선포 이후 30여 년 간 ‘뇌 과학’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이를 통해 뇌의 신비를 밝히고, 또 다른 인류세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말이다.

 신경 중심주의 , 나는 뇌라는 주장의 선봉에는 네덜란드의 디크 스왑이 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뇌다>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고 방치하는 모든 것이 우리 뇌를 통해서 일어난다.  환상적인 기계의 구조가 우리의 능력, 한계, 성격을 결정한다. 우리는 우리 뇌다.  과학은 이제 더는  질병의 원인을 찾는 작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는 이러이러한 우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작업, 우리 자신을 찾는 작업이기도 한다.”


 아마 뇌과학의 완성 독일 라디오 방송국 DLF < 스캔 속의 철학>에서 말한 “인간 정신(자유의지) 아니라, 뇌가 의사 결정을 조종하는  아닐까> 대한 긍정의 대답으로 귀결될 것이다. 아니면 <자유의지는 착각임을 증명할  있다> 주장이 참으로 판정됨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 무수한 시도에도 불구, 그리고 (무관심한) 대중의 ‘인간은 뇌 아니야?’라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인간은 여전히 읽어낼 수 없는 존재다.”라는 말로 신경 구성주의를 비판하고, 뇌과학에 대한 맹신적 희망에 일침을 날린다.


 결국, 가브리엘이 ‘나는 뇌가 아니다’라는 주저에서 목표하는 바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정신적 자유의 개념을 방어하는 .

 둘째, 우리가 보편적인 진실을 알아낼 능력이 있다. -> (필자가 활용하려는 아이디어) 따라서 도덕 상대주의(포스트 모더니즘)를 극복할 수 있다.



 위의 두 주장을 상술하기 위해 책 서두의 <프롤로그>를 인용, 재구성하겠다.(33p.)


 “사랑은 실은 특정한 <신경 전달 물질들의 칵테일> 동일하다는 주장, 혹은 사회적 일상에서 우리의 관계 맺기 행태는 까마득한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의 선조들이 익힌 행동 패턴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행태를 규정한다 주장 합당한 근거에 의한 추론이라기보다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성향에서 비롯된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자유롭게 살면서 타인들도 자유롭다고 전제하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타자는 지옥이니까. 여하튼 자유의 고통에서 벗어날  있다면 선택권을 기꺼이 양도하겠다는 사람들, 삶이 멋진 영화처럼 자기 내면의 눈앞에서 흘러가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납득할 만하다. 미국 철학자 스탠리 카벨의 말마따나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싶은 바람보다  인간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바람에 맞서 나(가브리엘)는 이 책에서, 정신의 개념이 자유의 개념과 짝을 이룬다는 생각을 옹호할 것이다. 자유는 우리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옹호하는 매우 추상적인 가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자유는 시장 경제가 우리에게 보장해주는 자유, 곧 소비자로서 다양한 상품들 중 일부를 선택할 자유에 국한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는 우리가 정신적 생물이라는 것에 기초를 둔다. 자연과학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의 인간성을 과학화한다면, 정신적 생물로서의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단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뇌과학이 포스트모더니즘(구성주의)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둘 모두의 결론이 반실재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은 뇌과학의 ‘인지(지각, 앎 등 퉁쳐서 이해해도 좋다)’는 (설명의 차원에서) 닮아있다. 칸트에 의하면 지각된 것은 선험적 카테고리에 의해 드러난 일부일 뿐이고, 뇌과학에 의하면 인지된 것은 유기체(뇌)의 필요에 의해 고도의 처리 과정을 거친 파편일 뿐이다. <물론 칸트는 신경 구성주의자의 선구자가 아니다. 칸트는 지각이 신경계의 구성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뇌가 인간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뇌과학의 모형과 칸트의 12 범주와 직관 형식(시간, 공간)은 C와 CO2 만큼 다르다. 하지만 실재에 대한 인식 불가라는 차원에서 익숙한 칸트를 활용하여 신경 중심주의를 설명하겠다. 칸트 전공자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칸트의 인식론이나 뇌과학의 인지 이론은 공히 모형(카테고리, 범주, 유기체의 필요) 직접 경험할  있다고 전제한다. 예컨대, 우리가 무수히 많은 파장  가시광선에 반사된 일부만을 지각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시각의 구조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구조의 한계 내에서만 인식하므로, 모든 것은 구성된 것일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성을 이끌어 내는 구조(우리의 시각 구조, 뇌의 인지구조)만큼은 우리가 명확하게   있으니,  구성에 대한 앎을 통해 실용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의 주장은 매력적이나 내적인 오류를 지닌다. 범박하게 설명하면 <진리는 없다는 명제는 진리여야 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결함이 있다>라는 논증과 유사하다. 가브리엘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구성주의의 이론은 우리가 세계의 모형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점에서 비일관적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 모형도 간접적으로 포위해야 한다면, 우리는 한편에 모형이 있고 다른 편에 그 모형이 모사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를 테니까 말이다.”

  이 반론의 핵심은 모형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평생 나 자신을 완전하게 볼 수 없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관찰자와 대상이 100% 합치하는 순간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모형(구조)의 바깥에 진실(실재)이 있다고 추측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구조에 대한 완전한 앎을 전제하지 않고, 구조 바깥에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실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불합리하다.



 위의 논의를 형식적인 차원에서 간결하게 정리하겠다.

 먼저 뇌과학적 포스트 모더니즘의 입장이다.

 1.만일 우리가 구조를 완전하게 안다면,  너머에 불가지의 실재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그리고  실재는 우리의 인식능력을 넘어서 있다.

 3.따라서 우리는 실재에 대해서 말할  없다.

4. 하지만 구조는 구조에 불과한 것이며, 실재가 아니다.

5. 따라서 구조에 의한 세계, 가치판단 등은 상대적으로만 정당하다.

6. 그러니 포스트 모더니즘이 옳고 인간은 뇌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가브리엘의 반론은,

1. 구조를 완전하게   없다.

2. 따라서 불가지의 실재가 확실히 있다고 말할  없다.

 3.  가지의 질적 구분도 정당화될  없다.

 4. 구조는 완전히   없고, 그렇다면 실재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도 없으니, 실재만이 진실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없다.

 5. 하지만 우리는 구조적으로 사고하기도 하고, 구조 바깥에서 사고하기도 한다.

 6. 그러니 구조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참이고, 구조 바깥에서 실재를 직관하는 것도 참이다.

 7. 결국, 상황에 따라 내가 인식한 것은 구조이든, 실재이든 동등한 차원에서 참이다.

 8. , 하나만을 관통하는 구성주의적 세계도, 실재론적 세계도 없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느냐고?” 위의 이유 때문에 ‘(하나의 지배적인 의미체계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것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파악한 모든 것들이 각각의 의미장에서 중첩하여 실재한다.(이 부분은 아직도 잘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라는 결론이다.


다음 글에서 가브리엘 논의를 내용적 차원에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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