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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Apr 27. 2022

[철학 에세이]칸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레토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논리만 필요한 건 아니지만. 논리는 중요하다

  언젠가 동료 철학도 B가, 일본인 친구의 트위터 문구를 소개했다. 그 문구는 B에게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것 같다.

 

 <'나는 칸트에게 구원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또한 그 '칸트에게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구원받고 있는 면이 있어서, 정말로 굳게 구원받아버린다면(의역 : 완전히 믿어버린다면) 구원받고 있다는 인식마저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한다.'>


 음. 이 말은 어떤 철학적 의미를 지닐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이 문구로 인해  나 역시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이 문구에 대해 흥미를 느낀 건 아니다. 이 문구는 Bullshit이다. 다만 논리적으로 부당한 이 문구를 철학도 B는 왜 의미심장하게 느꼈을지에 대한 의구심과 흥미가 생긴 것이다. 인문학적으로 보이는 현란한 문구에 현혹된 B를 보며, 소피스트에 의해 현혹된 그리스의 시민들이 생각났을 수도 있고, 부당하지만 혼란스러워서 철학스러운 듯한 문구가, 철학의 명료한 정신을 폄훼했다고 느낀 것도 있으리라. 아무튼 B는 이 문구에 꽤 감동했고, 나 또한 (B의 반응에 대해) 재미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둘이 이 문구에 대해 재미를 느낀 양상은 다르다. 당시 우리가 재미를 느낀 차이를 논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고, 그래서 내가 왜 그 문구에 흥미를 느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 글귀를 쓴 일본인(여기서 일본인이라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으니, 오해 마시라) 트위터가 어떤 의도를 가졌든, 이 논증의 결론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둘 중 어떤 것이든 부당하다. 하지만 이 글귀는 이단 종교인들이 종종 써먹을 듯한 그럴싸한 표현과 모호한 조사의 사용으로, 부당을 타당으로 여기게 하는 아우라(?)를 양산했다. 결국 이 아우라는 아마추어 철학자를 현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B의 사례로 입증된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약간의 의분과 함께.  (이렇게 아우라를 쓰면 벤야민이 화내겠지만, 소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쓰려하니, 양해를 바란다.)

 



 다시 트위터의 문구로 돌아오자. 이 문구의 결론은 다음의 두 명제로 압축된다.


 1.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이다 (모순이므로 부당)

 2.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은 자이다. (동일률이므로 공허, 무의미)


  1번 결론은 모순이고, 2번 결론은 동일이다. 따라서 둘 모두 논리적으로 부당하거나, 공허한데, 이 딜레마를 빠져나오려면 <“구원은 인식이나 정서나 의지나 행동과 무관하다. 즉 인간 삶 어디와도 관련되지 않음에도 필요한 개념이다”, 라는 논증을 추가해야 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문구의 작성자는 <구원 개념을 재구축>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고 '구원'개념의 재구축이 성공적이라면, 나는 이 글을 정정하겠다.

 

 혹시라도 논의가 진행될 수 있으므로 내가 생각하는 구원을 규정하겠다.

 <구원은 초월이고, 초월은 불완전을 완전으로 이끄는 것이므로 비약이고, 비약에는 무리함이 따른다. 무리한 것을 믿는 것이 종교이고 은총이며 계시이다. 따라서 초월을 탐색하는 것은 철학이지만, 초월을 주는 것은 종교이다.>  칸트는 철학자이고, 칸트는 구원을 줄 수 없다.



  다시 논의로.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정언 명제로 치환할 수 있는, 연역 논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부분은 재미 없으면 스킵바랍니다.


 x=칸트에게 구원받았다.


 1. 어떤 사람은 x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I명제, 환위 가능)

 2. 모든 x라고 말하는 사람은 x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A명제, 환위 불가)

 3. 모든 x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x를 확신하는 사람이다. (A명제, 환위 불가)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4번을 주장하면서 시작된다.


 4. 모든 x를 확신하는 사람은 x라고 말하는(인식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1~3이 타당하다면, 4번은 부당하다. (부당이라는 말은 필연적 참이 아니라는 의미)

 왜냐하면 3번 명제는 전칭긍정명제인데(모든 사람은 남성이다.) 이 명제가 참이면 반대 관계에 있는 E명제(어떤 사람도 남성이 아니다)는 반드시 거짓이기 때문이다.

 즉, 3번 명제인 모든 x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x를 확신하는 사람이다. 가 참이면

                     모든 x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x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는 반드시 거짓이다.


 그런데           모든 x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x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와 논리적으로 동치인 명제는

  4번 명제   4. <모든 x를 확신하는 사람은 x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가 된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고, 생각하는 사람은 확신하는 사람이므로

                4. <모든 x를 확신하는 사람은 x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 모순


 *여기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확신하는 것은 곧 인식하는 것이므로, 다음의 명제 또한 모순이다.

                4. <모든 x를 확신하는 사람은 x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 모순


 결론 : 칸트에게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칸트에게 구원받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 모순



자, 이 논증의 문제가 밝혀졌다. 이 논증의 문제는 4번 명제에서 비롯된다. 1~3까지의 논증 결과 4번은 부당하다. 즉 4번 명제는 형식적으로 부당하게 연역되었으므로 논리적으로 가치가 없는 명제인데, 그 마지막 명제 즉, '무언가를 굳게 믿으면, 무언가를 믿는다는 인식도 없어진다'라는 레토릭에 정서적으로 현혹된 나머지 이 추론이 타당하다고 (그릇되게) 믿으므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B가 이 문구에 감동한 것은 이런 모호한 표현방식과 문투, 즉 레토릭이 만들어내는 모호성(아포리아)때문이지, 그 함의가 갖고 있는 사유가 세련되고 멋지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논리적으로 부당한 표현도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예컨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나는 별로 감동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자가 이 일본 트위터의 표현을 문제 삼는 이유는, 이 표현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구원'이라는 초월적인 가치가, 유투버들이 올리는 영상처럼 개떡같이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좋은 유투버도 많아요.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이 문구 읽어보자.

 

<'나는 칸트에게 구원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또한 그 '칸트에게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구원받고 있는 면이 있어서, 정말로 굳게 구원받아버린다면(의역 : 완전히 믿어버린다면) 구원받고 있다는 인식마저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한다.'>





 내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건,

 먼저, 칸트를 통한 구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구는 마치 칸트에게 구원이 있는 듯이 말한다. 구원은 주관적인 것에 머무르는 속성이 아니다. 어떤 가수가 부르는 "넌 내게 구원이었어"라는 노래 가사는 개소리이다. 불완전은 불완전을 구원할 수 없다. 나는 돈과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돈과 명예를 구원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도이지만, 철학을 구원으로 여기는 인지부조화에 허우덕 대는 기만적인 사람이 아니다. 철학은 종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검토 없이 종교에 귀의하라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그게 더 큰 해악일지도 모른다. 개인에게나 인류에게나)


 아무튼 이 레토릭은 누군가의 마음에 남을 수는 있지만, 그 인상은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정당한 인상이 아니고 타당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으니까. 물론 그런 가소성의 세계가 GAFA나, 오은영 박사를 맹신하는 류의 사람들에게는 타당한 세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칸트는 그런 사람과 사고방식을 <계몽되지 못함>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니 이렇게 진위 판단보다 이미지가 중요한 요즘 세상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지성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정의대로 인간이란 <동물로 남아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물>이라면, 일본 트위터의 문구 따위는 우리를 이끌 동력이 없는 개소리임을 밝혀야 한다.


 이 문구에 감화된 누군가는 이 문구가 무엇인지 모른 채, 리트윗 숫자에 현혹되고, 레토릭에 취하여, "아! 칸트를 이렇게 멋있게 해석했구나, 멋진 표현이구나, 뭔가 있구나", 라며 지적인 느낌에 취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는 반철학적인 사고이다. 철학은 진리를 찾고,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이라는 것은 칸트가 줄 수 있는 것이다", 라는 해악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일본 트위터의 개소리를 (다시 말하지만 트위터의 발원지가 일본인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해하지 마시라.) 비판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문구가 양산되는 만큼, 유투버의 거짓 뉴스나 정치인이나 사고가 싸구려인 사람들의 이미지와 영상미만 가득한 발언의 조회수가 늘어날 것이고, 이를 수용하는 시민들은, 이를 검증할 능력을 상실한 채, "그런가부다", 하면서 점점 동물농장의 동물이 될 것만 같다.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 마지막 문장처럼 '그들은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로 인류 역사가 마무리되며 인간의 정의가 <인간은 동물로 남기를 택하는 동물>로 재규정될까 두렵다.




 그래서 개소리를 읊어대는 논객이나 글쟁이를 주의해야 한다. 주의하기 위해 우리는 주변에 널린 개소리 논증을 해체하고 박살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러한 능력을 일깨워야 한다. 하지만 국수영 답이나 맞추는 사고력으로는 그러한 능력이 깨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글에 공감한다면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길 바란다.


 

 철학함의 본질은 대충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대충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분위기나, 관습이나, 문화적 잣대,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레토릭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레토릭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은 트럼프의 언변이 그러하듯 핵심도 쟁점도 근거도 없이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들을 빙빙 둘러대는 말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같은자는 권력은 있을지언정 권위는 얻을 수 없다(없어야 한다). 철학은 그런 사회를 이룩하는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 공자, 맹자, 순자(순자 전공자는 적어서 순자주의자는 좀 적다.) 만 진리라고 떠들어대며 자리와 권력에 아첨하는 교조적인 철학 교수들은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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