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화된 세상의 언어 - 나 이런 사람이야

[서평] 당신 자신을 규정하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이를 깨무는 것과 같아

by 김태준

짧지만 괜찮은 책 - 오직 이 순간만 있을 뿐(day105)


모든 것이 자본과 통장 숫자로 환원된다.

자본과 통장이 아니라도

“요즘은 이런 이런 거에 흥미를 느껴. 이렇게 해보니 이렇게도 생각이 들더라” 보다는


“난 원래 내성적이라, 이제 50대여서 에너지가 부족해서, 겨울이니 이래야지 “,라는 자기규정적 언행이 넘쳐난다. 처음엔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 인간이 이렇게 고정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가. 애초에 인간은 사르트르 말대로 세상에 던져진 무규정적 존재가 아닌가.

신에 의해 본질이 정해진 존재라도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신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더듬더듬 방황하며 나와 인간과 세계를 체험하는 존재이다. 현재적 상황을 언급하는 것과 나란 존재의 고정된 성질을 확언하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는 이런 걸 잊은 게 아닐까. 자꾸 규정성의 늪으로 도망치는 게 아닐까.



결국

당신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결국 당신의 이를 당신이 깨물려고 하는 행위와 같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가장 낯선 것을 발견하고도, 그 낯섦을 견디지 못해 곧바로 명명하려 든다. 이름을 붙이면 안정되는 것 같고, 안정되면 구원받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안정은 대개 생명의 유동성을 배반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봉인이다. 봉인이란 곧 잠금장치이고, 잠금장치란 곧 통증을 예비한다. 이를 악무는 순간 우리는 확실해지지만, 그 확실함은 언제나 아프다.


삶은 예외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은 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정된 정의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때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 정의를 버리거나,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 대개는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그 후자의 선택이야말로 ‘이를 깨무는 것’의 지속이다. 자기 자신을 살리려다 자기 자신을 누르는 모순, 자기 자신을 지키려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역설. 바로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기규정


고르기아스의 냉소가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완전한 어떤 것이 없다, 있다 해도 파악 불가능하다, 파악해도 전달 불가능하다. 나는 나를 완전히 알 수 없고, 설령 아는 듯해도 그것을 문장으로 온전히 옮길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장으로 자신을 확정하려 든다. 그 욕망은 철학적이라기보다 생리적이다. 살아 있으려면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 불안을 분류표로 바꾸려는 강박, 미지의 덩어리를 표찰로 환원하려는 강박.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기보다 관리하려 한다. 그리고 관리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물체로 만든다. 물체가 된 나는 더 이상 흐르지 못한다.


더 기묘한 것은 사랑과 우정에서 드러난다. 사랑은 뜨겁다고 말하는 순간 식고,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 균열이 시작된다. 우정은 사소한 오해에 의해 얼룩지고, 그 사소함이 오히려 영원을 요구한다. 이 불일치가 인간의 질감인데, 우리는 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규정으로 덮어버린다. “나는 원래 그런 관계가 안 된다.” 이 문장들은 상처를 덮는 붕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처 위에 더 단단한 물체를 얹는 행위다. 회복을 돕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막는다.


그러므로 결론은 “규정하지 말라”가 아니다. 그런 선언은 또 하나의 규정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성질을 바꾸는 일이다. 단정이 아니라 가설로, 마침표가 아니라 유예로, 완결이 아니라 진행으로 자신을 말하는 일. 나는 한 문장으로 닫히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 수정되는 초안이다. 초안에게 필요한 것은 확정이 아니라 방향이다. 도달할 수 없는 지평선이더라도, 그쪽을 향해 걷는 방향.


결국 당신을 규정하려는 충동이 올라올 때,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전자는 이를 깨무는 질문이고, 후자는 이를 풀고 숨을 쉬게 하는 질문이다. 완전은 없을지 모른다. 있다 해도 잡히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쪽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 그 기울어짐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이다. 그리고 그 존엄은 자신을 한 문장으로 잠그는 데서가 아니라, 끝까지 열어 둔 채 견디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완전히 열린 존재도, 닫힌 존재도 아니다. 자유롭지 못한 삶의 가능성은 없었지만, 태초부터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 그리고


도망친 곳에 구원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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