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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Dec 09. 2021

[경제 에세이] 2020년 가을에서 겨울

돈만 소중한 이 세상에서

 나는 원래 주식에 호의적인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식을 잘 알지 못하고, 알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다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성향 탓인 듯하다.

 

 2020년 여름 즈음부터, 돈을 불리는 방법(유독 돈만큼은 찌는 것이 빠지기보다 어렵다)의 하나인 주식투자에 대해 누구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론을 필두로, 친한 친구도, 주변의 아이 아빠도, 개천 옆을 걸어 다니는 아주머니도, 예술가도 모두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부동산, 주식, 코인에 대한 이런저런 노하우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결국 이런 교류의 본질은 딴 쪽과 잃은 쪽이고, 자랑하는 쪽과 부러워하는 쪽이었다. 나는 대체로 부러워하는 쪽이었다.

 6,000만 원을 투자해서 1,800만 원을 벌었을 때는 단체 메시지 방에 난리가 난다. 실없는 축하를 주고받는다. 그때부터 그 친구는 어느 종목이 어떻다는 둥 기업 대표보다 내부정보를 잘 아는 전문가로 변모하여 투자 강의를 진행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얼마를 땄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수익률을 캡처한 사진을 올리지도 않는다. 우리는 좀 더 멋있게 살 수 없을까.


 우리는 어떤 사안에 접근할 때 상식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코로나  현황을 오전 11시에 제시한다고 해서 11:00에 뉴스를 들은 사람이 가장 먼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런 정보의 최초취득과 정보의 전파과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적인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이건 내부정보인데”라는 표현을 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리고 주식(돈) 세계는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처럼 누구나 서로가 서로에 대한 늑대이지 않을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이런 분위기에 꽤나 지쳐간다는 것이다. 사회 분위기라는 것은 참 무섭고, 우리가 거부하려고 해서 쉽사리 거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에스키모가 추위에 강하거나 북방계 민족의 눈이 더 작다는 생물학적인 진화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사람은 어쨌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치를 사회 내에서 파악하는 동물이므로 내가 속한 사회의 가치체계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금권주의라는 분위기의 압박이 요즘만큼 심할 때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코로나 때문에 다들 할 일도 없고 돈 버는 것만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취미란 참 중요한 것이다.


 이런 압도적 분위기는 나의 세계를 구축하며, 밀어내며, 비집고 들어와 어느새 나의 고유한 세계를 침잠한다. 안 그래도 나란 녀석이 이해가 안 되고, 조용히 입 다물고 명상에 잠겨도 나의 두 발이 존재론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알기 어려운데, 여기에 돈 돈 돈 열풍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면 무엇이 개인의 생각이고 무엇이 사회의 분위기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시류에 민감한 사람과 자주 만날수록 자신의 조용한 우물이 일반적인 강으로 흡수되기 쉽다. 그들의 상가 월세, 꼬마빌딩 어쩌구 등의 대화는 본질적으로 질투와 부러움의 양산으로 정의될 수 있고, 이 질투와 부러움은 동력이 매우 강하여, 개인의 소소한 신념과 삶의 패턴을 무너뜨린다. 언젠가 나름대로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던 친구가, 결국은 돈벌이에 인생을 소모하는 것 같아 꽤 슬펐던 경험이 있다.


 스타벅스 아줌마들이 부러워하는 깊이 없는 돈을 번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런 외침은 주변에 널리, 빠르게 퍼져 많은 사람을 돈과 아파트와 주식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덕성이 싹을 틔울 수가 없고, 벤츠 S클래스보다 문학박사 학위가 귀할 수 없다. 투기는 섬세한 투자일 뿐이며, 삼백만원 정도의 이익을 보기 위해 애가 셋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는 부모에게 전셋값을 3억 올리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가 변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부를 축적하였을 수는 있으나, 이를 자랑하지도 않았고, 인생에서 부끄러움과 유덕함을 가리어 행동했으며, 자동차와 사는 동네로 사람을 평가하지도 않았다. 자동차는 전봇대에 부딪치면 찌그러지는 물건이고, 동네는 이사하면 바뀌는 주민등록상의 임시 명칭일 뿐이다.


 틈틈이 친구를 만나도 이런 얘기만 하게 될 것 같아 두렵고, 이런 이야기를 안 하면 또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아 더욱 슬프다. 여하튼 돈 버는 인생은 매우 중요하지만(거리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이런 분위기와 이런 사고방식의 인생이 더욱 공허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변해가는 나를 바라보면서도 지탱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도는 실향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찾고 싶은 가장 소중한 것이 돈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우리는 우리를 발견하기 위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만 같다. 너무 실용적으로 변해 시와 밤하늘의 별과 내 가슴의 양심을 느낄 수 없을 것만 같고, 나를 찾는 긴 여정에 발걸음을 내딛기보다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돈을 찾아 달려갈 것만 같다. 본질적으로 상실인 우리의 삶을 상실을 논할 수도 없는 숫자의 세계로만 하강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런 나와, 이런 너가 만나면 우리는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대화에는 함께 나눌 소중한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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