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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n 매거진 Dec 05. 2023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박현도 교수가 짚은 분쟁의 원인

지난 10월 7일, 중동의 화약고가 폭발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 세력인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이 이어지면서 민간인 희생자가 급증하고 있다.
사실 두 국가의 분쟁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역사·종교·정치적 요인이 한데 뒤섞이면서 그 양상은 매우 복잡하다.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박현도 교수와 함께 분쟁의 원인과 국제 정세의 변화를 살펴봤다.
© Shutterstock

유대 독립전쟁과 타향살이
기원전 63년 로마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후 유대주(Provincia Iudaea)로 부르며 다스렸다. 로마는 기원전 6년부터 세금을 걷으며 이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했다. 이에 반발한 유대 독립투사들이 봉기해 66년부터 70년까지 제1차 독립전쟁을 벌였으나 로마는 이를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진압하고 예루살렘 성전산에 자리한 유대교의 성전을 파괴했다. 로마가 유대인을 노예로 팔고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가면서 본격적인 유대인의 이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73년 마사다 요새 옥쇄로 막을 내렸다. 로마제국 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해를 바라보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 로마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요새 함락 직전에 10명의 유대인이 동료와 가족을 죽이고 마지막 한 명은 자살해 모두 960명이 목숨을 끊었고, 2명의 여성과 5명의 어린이가 포로로 잡혔다. 132년부터 135년까지 유대인은 다시 로마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유대인을 굴복시킨 로마는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유대주를 ‘시리아 팔라이스티나’주에 붙여 유대인의 흔적을 지도에서 지웠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인근 지역에서 모두 추방되었고, 성전 파괴를 애도하며 단식하는 날인 티샤바브(아브월 9일, 2023년은 7월 26일 일몰~27일 일몰)에만 예루살렘 출입을 허락했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제국에 이어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비잔티움 제국은 614년 페르시아 사산제국의 손에 예루살렘을 빼앗겼다가 629년 수복했다. 그러나 새로이 등장한 아랍의 무슬림들은 638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허락했다.


유럽인의 죄와 시온주의
거주지에 따라 유대인은 크게 미즈라힘(중동 유대인), 세파라딤(스페인 유대인), 아쉬케나짐(유럽 유대인)으로 나눈다. 세파라딤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슬림이 지배한 이베리아반도에서 살던 유대인을 말한다. 미즈라힘이나 세파라딤과 달리 아쉬케나짐은 유럽 그리스도인의 박해로 힘들게 살았다. 1900년 4억 유럽 인구 중 유대인은 약 900만 명으로 추산한다. 1897년 통계에 따르면, 약 520만 명의 러시아 유대인 중 94%는 발틱해에서 북해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다. 1881년 유대인이 알렉산드르 황제를 암살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러시아인들의 유대인 박해 ‘포그롬’이 발생하자 혹독한 폭력에 견디다 못해 1882년 7000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포그롬과 함께 프랑스의 드레이퓌스 사건으로 유대인의 유럽 생활이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대인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여겼던 프랑스에서 유대계 프랑스인 장교 드레이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기밀을 넘긴 스파이로 몰려 유죄 선고를 받았고, 유대인이었던 그는 죄인으로 몰리게 됐다. 후에 진범이 잡혔지만, 프랑스의 반유대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이 사건을 지켜본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국가인 프랑스에서 유대인의 삶이 이렇게 불안하다면 유럽 어느 곳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대인이 살 곳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사실 헤르츨에 앞서 이미 독일의 모제스 헤스(Moses Hess, 1812~1875)는 독일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힌 반유대주의는 없앨 수 없기에, 유대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만드는 운동을 시온주의라고 하는데, 시온은 기원전 10세기에 다윗이 정복한 여부스족이 예루살렘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시온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쓴 사람은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나탄 비른바움(Nathan Birnbaum, 1864~1937)이다. 1897년 비른바움과 함께 헤르츨은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시온주의자협회를 발족했고, “나는 바젤에서 유대인 국가를 만들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헤르츨은 박해를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라고 여겼고, 안전하다면 어느 곳이나 좋다고 생각해 팔레스타인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영국 정부와 협의해 우간다 이주안을 1903년 제6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제안했지만 헤르츨이 사망한 이듬해인 1905년 제7차 회의에서 폐기됐다.

“신부는 아름다우나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시온주의자 회의가 결성되던 즈음 팔레스타인 상황을 알아보러 갔던 유대인들이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신부 팔레스타인은 아름답지만, 이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랍인 품에 안겼다는 말이다. 역사적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당시 팔레스타인의 인구 구성 비율을 이해하기에 이보다 더 알맞은 말은 없다.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여기는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 비율이 96%, 유대인 비율이 4%였다. 이를 두고 1970년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신랑이 너무 약해 신부를 뺏을 수 있었기에 매일 밤 신께 감사한다”라고 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유럽인의 박해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면서 팔레스타인 문제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살지 않던 땅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곳에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것도 최소 638년부터 시온주의자 회의가 결성된 1897년까지 십자군이 지배한 103년을 제외하면 무려 1156년 동안이나 말이다.

시온주의를 주창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인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라고 말하는데, 팔레스타인은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1917년 외교장관 밸푸어 명의로 영국의 유대인 자본가 로스차일드 경에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거처(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를 마련해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른바 ‘밸푸어선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령으로 받은 영국은 이를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으로 나누었고, 유대인은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계속 이주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영국의 친유대인 정책에 강력히 항의하며 저항했다. 깜짝 놀란 당시 영국의 보수당 정부는 밸푸어선언 및 친시온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유대인 이주민 수를 제한하며 10년 내 아랍인과 유대인 공동의 독립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하고 1945년 7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패하면서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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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분할과 제1차 중동전쟁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면서 결국 아랍인과 유대인의 공존을 이끄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미국과 손을 잡고 해결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기에 유엔에 해결책을 맡겼다. 이에 유엔은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제시했다. 유대인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부했다. 그런데 분할안이 총회 안건으로 올라 찬성 33표, 반대 13표, 기권 10표, 불참 1표로 통과되었다. 분할안이 통과된 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두 달간 아랍인과 유대인의 충돌로 무려 1,000여 명이 죽고 2,000여 명이 다쳤다. 3월 말에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2배로 뛰어 사망자가 2,000명,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다.

1948년 5월 14일 자정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직전인 오후 4시에 이스라엘은 독립선언을 했고, 다음 날 시리아·레바논·이집트·요르단·이라크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이라크 총리 누리 알 사이드는 이스라엘을 박살 내고 유대인들이 숨은 모든 곳을 없애버릴 테니 아랍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처자식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랍 연합군의 약속과 달리 이스라엘을 절멸시키지 못하고 끝났다. 잠시 집을 떠나도 곧 돌아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던 아랍 지도자들의 허황된 약속은 팔레스타인 난민 수만 늘리고 말았다. 당시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의 후회 섞인 말처럼 8000만 아랍인과 4억 무슬림이 즉시 와서 기적과 같이 도와줄 것이라는 실현할 수 없는 거짓 약속으로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랍국에 둘러싸여 고립무원 상태에서 배수진을 친 이스라엘은 전쟁이 끝난 후 사라지기는커녕 유엔 분할안보다 오히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독립과 더불어 유엔에 정식 국가로 가입하는 선물까지 얻었다. 제1차 중동전쟁을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고 하지만 아랍은 안나크바, 즉 대재앙이라고 부른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이스라엘이 거부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에즈운하와 제2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은 1956년 7월 26일 이집트가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한 지 3개월 후인 10월 29일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합동 공격해 발발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선제 공격한 다음 날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최후통첩을 보낸 후 카이로를 폭격했다. 이틀에 걸친 공격은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이 사전에 공모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가 국유화한 수에즈운하를 빼앗아오려 했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에 굴복해 연말에 병력을 철수했다. 이스라엘은 이듬해 3월까지 군사를 주둔시켰고, 결국 티란(Tiran)해협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물러났다.


1967년 제3차 전쟁: 6일 전쟁
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공군력을 파괴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해 6일 만인 6월 10일에 끝났기에 ‘6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우선 시리아로부터는 전략적 요충지인 골란고원을 빼앗아 지금까지 점령하고 있다. 갈릴리 호수 해발 900m 높이의 이 고원에서 시리아는 이스라엘 쪽 농촌에 포격을 가했다. 이집트로부터는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요르단으로부터는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탈취했다. 시나이반도는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1982년 반환했고,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선 1993년 9월 오슬로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가 시작되었다. 3차 중동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영토를 3배 확장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10월에 벌어진 전쟁이라 ‘10월 전쟁’, 무슬림 단식월인 라마단월이었기에 ‘라마단 전쟁’, 욤키푸르, 즉 유대교의 속죄의 날에 벌어진 전쟁이라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집트의 기습 공격 성공으로 이스라엘은 개전 초기 연패를 당했다. 후반으로 가면서 만회하기는 했지만, 아랍인은 제4차 중동전쟁을 승전으로 기억한다. 정보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정보전 실패의 교훈을 남겨준 쓰라린 전쟁이다. 48시간 전에 적의 침투를 감지한다는 이스라엘의 신출귀몰 정보력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붕괴한 전쟁으로 이스라엘 정보 당국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이스라엘은 전쟁 10일 전 요르단 후세인 국왕이 직접 헬기를 몰고 이스라엘로 와 골다 메이어 총리에게 전쟁 가능성을 알려주었는데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중재로 10월 22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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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평화, 암살
제4차 중동전쟁은 아랍 산유국이 이집트에 동조해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는 나라에 석유를 팔지 않겠다고 하면서 전 세계에 전대미문의 석유파동을 불러일으킨 전쟁으로 유명하다. 미국은 석유 위기를 겪으면서 1975년 자국 내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우리나라는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하면서 경제난을 뚫는 기회를 마련했다. 네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아랍과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평화 공존의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79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조약을 맺어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고, 1994년에는 요르단이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루었다.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철천지원수인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와 1993년 오슬로 평화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평화는 암살로 이어졌다.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베긴 총리는 1978년,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교장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는 1994년 각각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지만, 사다트는 1981년, 라빈 총리는 1995년 평화를 반대하는 자국의 극단주의자들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2023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는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안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다스리지만, 군대가 없는 자치 정부이기에 여전히 이스라엘의 점령지다. 1987년 제1차 팔레스타인 민중항쟁에서 등장한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운동’의 아랍어 약자로 이스라엘을 절멸하고 그 자리에 팔레스타인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무장조직이다. 스라엘과 평화안을 거부하는데, 2005년 정당을 결성하고 2006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선거에 처음 입후보해 132석 중 74석을 차지하며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집권당이었던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파타와 2007년 내전을 벌여 가자를 장악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사실상 둘로 나뉘어 요르단강 서안은 파타, 가자는 하마스가 양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마스는 외부 접촉이 원천 봉쇄된 가자에서 땅굴을 뚫어 생존을 도모하며 사제 로켓을 만들어 대이스라엘 무력투쟁을 꾸준히 벌여왔는데, 지난 10월 7일에는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스마트 철책을 넘어 이스라엘 마을을 점령한 뒤 주민을 사살하고 인질을 잡아 가자로 돌아왔다. 이에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소탕하겠다며 무자비한 공습으로 무고한 시민을 살상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


네타냐후의 욕심
네타냐후 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집권 1996~1999, 2009~2021, 2022~). 2002년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면 아랍국이 바로 이스라엘과 수교하겠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제안을 거부한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보다는 먼저 아랍 국가와 수교를 맺고자 노력해 왔다. 엄밀히 말해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반대한다.

사실 가자를 하마스가 차지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도운 것도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힘을 빼놓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하마스가 가자를 장악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적의 영토로 간주해 무차별 공세를 퍼부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가자를 완전히 봉쇄했다. 가자 주민은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자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하마스가 10월 7일 공격의 명분으로 16년에 걸친 가자 봉쇄를 든 이유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해법은?
하마스는 가자 봉쇄, 요르단강 서안지구 이스라엘인 불법 정착촌 확대, 불법 정착민의 팔레스타인 사람 공격, 극우 이스라엘인의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 폭력 사태를 침략의 이유로 들었지만, 시기상 이스라엘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수교를 맺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려고 한 것 같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야 이스라엘과 수교를 할 수 있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건에 응하려면 이스라엘은 하마스 대신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대화하며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하마스와 의견을 나눌 리 없을 테니 하마스는 소외될 것이다. 그보다도 이스라엘과 공존을 논의한다는 사실 자체를 하마스는 인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헤즈볼라,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예멘 후시 반군 등 이란이 후원하는 무장 세력 역시 하마스와 마찬가지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수교를 원하지 않는다. 이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하마스의 공격에 이란이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물론 이란은 하마스 공격과 이란은 서로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은 항모까지 급파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힘든 판에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전선을 열 수 없는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확전을 막고자 노력 중이다. 헤즈볼라가 참전하면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이란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까지 이란에 물밑으로 전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현재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더 깊게 보면 미국과 이란의 대리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정말 확전이 이뤄진다면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을 막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원유와 가스 수급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쳐 세계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확전의 열쇠는 이스라엘이 쥐고 있다. 세계 여론은 이스라엘이 하마스 소탕 작전이라는 명목 아래 민간인을 살상한다고 규탄하며 휴전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민간인 피해가 불가피하다면서 멈추지 않는다. 상황이 계속 악화하면 헤즈볼라 등 친이란 무장 세력이 이스라엘 공격에 적극 가담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공격과 보복, 항쟁과 진압이라는 악순환을 끊는 궁극적인 해법은 팔레스타인 국가 독립이다. 안전한 이스라엘은 평화 공존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로만 보장할 수 있다. 1993년 오슬로 정신을 살려 유혈극을 멈추도록 국제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 싸움 없는 평화로운 날이 팔레스타인에 하루라도 빨리 오길 바라며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의 안식을 빈다.

ㅣ 덴 매거진 2023년 12월호
글 박현도(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에디터 김보미 (jany6993@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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