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피를 토하는 밤, 만화루의 창살에 기형도가 꽂혀 있었다. 칼날은 뱀의 혀처럼 갈라져 있었고, 그 아래서 18세 기녀의 시신이 피로 물든 비단 옷을 입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목에는 검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허리춤에 찼던 비녀는 부러져 머리카락과 피가 뒤엉켰다.
"달이 밝을수록 잠들기 힘든 밤이오."
이종학이 만화루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냈다. 담뱃잎을 말아 입에 물자, 잿빛 연기가 창살 사이로 스며들었다. 봄밤 공기가 그의 눈가 주름에 서린 땀을 식혔다.
"종리형, 네놈의 호신용 단도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겠지."
이종학이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 종이 사이로 기형도의 그림이 드러났다. 칼자루에 새겨진 뱀 문양은 종리 가문의 표식이었다. 만서관 제일의 기재라 이름 높았던 이종학은 그 모든 죄를 부인했다.
"그 년이… 그 년이 달라고 해서…!"
종리형의 손목을 휘감은 쇠사슬이 철컥거렸다. 청년의 눈동자는 푸른 달빛에 비쳐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그는 거짓이 아니라는 듯 강변했다. 모든 증거는 종리형에게 향했다.
"감옥에서 벌레처럼 썩어라. 네놈이 저지른 죄값을 치르는 거다."
삼 년 전, 강가에 버려진 시신.
종리형의 아버지는 사채업자였다. 종리형이 문장가로 가문을 번듯하게 일으킬 것이라 믿고 아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종리형의 아버지는 이종학의 상관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친 덕분에 가택 연금으로 전환했다. 노비와 친우들의 그럴듯한 증언도 쏟아졌다. 물론 만들어진 증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정도였다. 그의 상관은 수사에 개입했고 기녀의 방과 만화루를 먼지 털듯 뒤지게 했다. 죽은 기녀는 노비들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고 노비들을 돌봤다고 했다. 노비들의 잡다한 물건이 쌓인 방에서 기녀의 옷가지 사이로 서책 하나가 발견되었다.
우연이었다. 글자를 모르는 노비는 기녀가 태우라는 서책을 감싼 비단이 고와 따로 팔 생각에 챙겼던 것이다.
죽은 기녀가 남긴 일기장에는 뱀 문양이 새겨진 칼과 종리 가문의 악행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종리학의 아버진 종국의 사채업장에서 뛰쳐나온 노비 소녀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 노비 소녀의 아버지가 도박장에서 닷냥 빌린 돈이 몇 백배로 불어나 딸들을 팔고 그 어미를 팔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이었다. 그녀의 동생은 만화루로 팔려왔고, 언니는 종리형의 침실에서 겁탈의 수모를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기녀는 삶을 체념하고 살아가다가 다정한 종리형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어느날 복수의 고리는 종리형의 목걸이에 걸린 옥패에서 시작되었다. 뱀의 문양이 있는 옥패는 가문을 지옥으로 몰고간 사채업자의 문장이었던 것이다.
"사랑이라…? 가문의 치부로 이룬 이들에게 무슨 사랑을 말하는가."
이종학이 일기장을 불 속에 던졌다. 막대한 뇌물로 사건은 묻혔고 종리학을 더 이상 잡아둘 수 없었다. 종이장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지난 밤의 피내음과 겹쳤다.
피로 물든 달 아래서
종리형이 기형도로 자신의 목을 그은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그의 시신 옆에서는 찢겨진 노비문서가 바람에 날렸다. 이종학은 유서 대신 주머니에서 나온 옥비녀를 손에 쥐었다. 비녀 끝에 새겨진 '복(福)'자가 칼날에 갈라져 '복(卜)'으로 변해 있었다.
"복이 변하면 점괘가 되고, 점괘가 변하면 저주가 된다더니."
술병을 기울이자 달빛이 붉은 포도주처럼 목넘김을 타고 내려왔다. 창밖에서 만화루의 꽃잎이 흩날리며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봄이 왔지만, 이곳의 겨울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