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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 이루지 못한 사랑을 꿈꾸어서 슬프구나

미래는 그리 예지하지 않았지만 그리 예정되었네

by Dennis Kim

패왕별희: 영원히 맺히지 못할 사랑이 남긴 것

- 예술가의 심장을 찢는 두 개의 태양, 그 사이에서 타버린 영혼의 기록


1. 황금빛 감옥에 갇힌 두 개의 태양

리첸롱(레이)과 두언옌리(리즈). 1924년 베이징의 어느 오후, 경극 무대 위에서 그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삼켰다. 리첸롱은 초패왕 항우의 포효를, 두언옌리는 우미인(虞美人)의 절규를 연기했다. 관객은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두 별이 충돌해 우주를 불태우는 광경을 보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대 아래에서 그들은 서로의 빛을 이겨내지 못했다. 리첸롱의 아내가 무대 뒤에서 지켜보는 눈빛, 두언옌리가 리첸롱의 옷깃을 스치는 손가락의 떨림. 경극의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들은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당신은 초야의 왕이에요. 저는 그저 당신의 그림자를 따라다니는 우미인일 뿐."

- 두언옌리가 리첸롱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중에서


2. 사랑은 예술을 삼키고, 예술은 사랑을 잡아먹는다

1937년 상하이. 전쟁의 불길이 도시를 덥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마침내 한 방에 갇혔다. 리첸롱이 두언옌리의 손목을 잡으며 "도망가자"고 속삭였을 때, 창밖에서는 일본군의 폭격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언옌리는 흐느끼며 연단(硯台)을 가리켰다. "저기, 왕의 옥새가 아직 미완성이에요."


그 순간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리첸롱은 두언옌리가 남긴 마지막 경극 의상, 금실로 수를 놓은 황룡포를 불태우며 20년을 보냈다. 재 속에서 그는 매일 같은 문장을 되뇌었다.

"예술이 우리를 신이 되게 했고, 사랑이 우리를 인간으로 돌려놓았다."


3. 불가능한 사랑의 해부학: 왜 우리는 상처받는가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의 고독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고독이 두 개로 갈라지는 것이다." 패왕별희의 비극은 고독을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눈 고독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자아의 분열'로 정의했다. 리첸롱과 두언옌리는 예술가로서의 자아와 연인으로서의 자아를 통합하지 못했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완성시킨 '왕과 우미인'의 사랑은, 현실에서의 불완전한 사랑을 영원히 압도했다.


4. 영원히 지지 않는 꽃: 상처가 남긴 유전자

1993년, 천카이거 감독은 『패왕별희』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두언옌리가 검을 들고 춤추는 장면은 현실의 두언옌리가 1966년 문화대혁명 중 자결한 실제 사건을 오버랩시킨다.


이것이 불가능한 사랑의 최후다. 상실은 예술작품이 되어 후세에 유전된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무한히 반복되는 기다림이라면, 『패왕별희』는 무한히 재생되는 이별의 순간이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들이 겪은 아픔이 우리 DNA에 각인된 '실패한 사랑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5. 끝나지 않는 마지막 장: 당신의 패왕별희는 무엇인가

밤마다 SNS에 올라오는 수십억 개의 이별 게시물. 현대인들은 리첸롱과 두언옌리보다 자유로우면서도 더 깊은 감옥에 갇혔다. 사랑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에겐 적어도 불태울 무대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읽히지 않는 '읽음' 표시와 추억으로 가득 찬 카카오톡, 커플앱의 흔적일 뿐이다.


"사랑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예술작품이다."


오늘 밤, 당신 인생의 『패왕별희』는 어느 장면에 머물러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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