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사람] 위스테이별내 입주자 이은정 님
[옆집 사람]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사이’라는 건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로 측정되는 게 아닌가 보다. 가까이 있어도 먼 사이가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이 그렇다. 인사를 한다든가 안부를 묻는 대신, 경계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살핀다. 아파트형 마을공동체, 위스테이는 바로 그런 점에서 달랐다. 얼굴도 모르는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가 하면, 해 질 무렵에는 단지 안이 자전거 타는 아이들로 복작였다. 순간 단지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반 워킹맘’이라 밝힌 이은정 님은 미싱 동아리와 육아 품앗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육아 품앗이 모임에서는 매주 돌아가며 엄마들이 아이들의 선생님을 자처한다. 최근에는 핼러윈을 맞아 단지 아이들을 위한 파티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찾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집이 달라진 것뿐인데, 어떻게 자신을 찾는다는 것일까. 이야기가 끝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실과 부엌의 창을 열어놓으면 바람이 통해요. 환기가 잘 돼서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지인들이 훨씬 넓은 평형이 아니냐고 물어 오기도 해요.(웃음)
공동체 아파트라는 형태가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보니 저희도 여기서의 삶을 확신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임대 아파트를 향한 선입견과 좋지 않은 기사를 접하면서 걱정도 많이 됐죠. 그래서 주변에 선뜻 추천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 행복한 모습이 주변에 드러나나 봐요. 가끔 SNS로 일상을 공유하곤 하는데, 왜 이렇게 달라졌냐고 하더라고요. 정보를 먼저 물어 오시고, 공실이 나면 바로 알려 달라는 분도 생겼어요.
아니요, 작은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래요. 보통 워킹맘이라고 하면 근무 시간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거기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 스스로를 ‘반 워킹맘’이라고 소개해요.
웹 디자이너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육아를 시작하며 퇴사를 하게 됐는데,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아동복 쇼핑몰을 하게 됐죠. 대학 다닐 때 여성의류 쇼핑몰을 운영한 적 있는데, 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전에 살던 집과 비교하자면, 같은 경험이라도 이곳에서는 다르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아이들을 등원 시키고 나면 더 없는 평화가 찾아오죠.(웃음) 전에는 혼자 누워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되게 무기력했어요. 지금은 혼자 있는 시간도 꽉 차있는, 충만한 경험으로 느껴져요.
빌라였고, 신혼집이었어요. 집이 언덕에 있어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는 것도 위험했죠. 주변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장소가 없어 주말이면 차에 자전거를 싣고 가까운 공원까지 나가기도 했어요.
아이에게 무언가를 경험시켜주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자산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위스테이에서는 아이에게 좋은 양분이 되어주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어 좋아요. 멀리 나가지 않아도 아이들의 놀 거리가 충분하니까요. 보다 안정된 환경에 자리 잡게 되니 저와 남편도 조금은 자유로워졌고요.
요즘 집 구하는 게 정말 어렵잖아요. 집을 소유한다고 해도 생활의 문제는 여전히 있겠죠. 자산을 늘리는 것도 좋지만,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도 있고요. 함께 뛰어놀 수 있는 동네 친구들과 어른들의 보살핌이 바로 그런 거예요.
출산 이후에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아이 엄마들이었어요. 서로를 부를 때는 누구 엄마 아니면 아이 이름으로 불렀죠. 그런데 여기서는 모두 제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점이 좋았어요. 잃어버린 나를 찾은 느낌이랄까요. (웃음)
이사 오기 전에는 삶의 초점이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었어요.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로 살다가 위스테이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살게 된 거죠. 동아리 활동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넘게 못하던 축구 동아리에 가입했고요. 저는 아이들이 등원해 있는 동안 개인적인 시간도 가지고, 미싱 모임과 육아 품앗이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전에도 쇼핑몰을 하며 의류를 접해왔기에 계속 미싱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들여야 할 수고가 많더라고요. 동네 문화센터를 알아봐야 하고, 오가는 시간도 만만치 않죠. 일과 육아를 하는 상태에서 동아리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미싱 동아리가 열린다기에 냉큼 신청했죠.
신기한 것은 서로의 재능기부로 동아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도 너 나 할 것 없이 자투리 원단을 가져와 나누고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자기 것을 공유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 같아요.
입주 초기, 어린이집도 갈 수 없고 거리두기 때문에 아이들과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생각하게 됐어요. 어떻게든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는데, 아이 엄마들이 모여 돌아가며 선생님이 되면 어떨까 했죠. 다섯 집이 매주 번갈아가며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어줘요. 미술놀이를 하기도 하고, 가을 소풍을 다녀오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핼러윈을 맞아 파티를 했어요. 모든 준비는 너 나 할 것 없이 함께했고요. 힘들 것 같지만 막상 엄마들이 더 재밌어서 샘솟는 아이디어를 공유하기도 해요.(웃음)
* 육아 품앗이 : 양육자들이 품을 나누어 아이들을 돌보는 것. 품앗이 활동을 통해 육아의 부담을 덜고, 아이의 경험을 확장시킨다.
조금 더 많은 가정과 아이들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활동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핼러윈 파티 때는 모임을 구분하지 않고 신청을 받아 많은 아이들과 어울렸죠. 영어를 가르치는 다른 조합원님의 재능기부로 포토존을 만들고 영어 수업을 하기도 했고요.
아까 ‘나를 발견한다’고 했잖아요. 동아리 활동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관계가 생겼다는 게 좋아요. 그런데 이런 관계가 가능한 것은 공간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때문인 것 같아요. 널찍한 공간도 좋지만, 무엇보다 여기 사는 모두가 자발적으로 움직여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나아가 이런 행사를 할 때마다 내가 이곳을 위해 헌신했다는 뿌듯한 마음도 들고요.
최근에 있었던 마을 결혼식은 제 결혼식도 아닌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물론 그런 행사를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때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하해 준 것 같아요. 그 광경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따스해지네요.(웃음)
어렸을 때 저희 가족은 늘 바빴던 것 같아요. 동네에 대한 추억이 희미하죠. 그런 결핍 때문인지 마을 공동체라는 단어는 저를 설레게 해요.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가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다른 아파트보다 쉽게 소통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면서.
아직 저를 많이 찾는 편이지만, 단지 내부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혼자 산책도 하면서 조금씩 경계를 내려놓고 있어요. 육아 품앗이와 그림책 모임에서도 처음에는 많이 부끄러워했는데 다녀오고 나면 표정도 밝아지고, 좋아하더라고요.
맞아요. 탁 트인 하늘이 너무 예뻐 한동안 하늘을 많이 찍었어요. 산으로 둘러싸여 사계절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아요. 조금만 나가도 산과 잔디가 있으니 놀러 온 것 같은 기분도 느껴지고요. 아이들이 놀 것도 많죠. 그래서 주말에 단지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어요.
베란다콘서트요. 아이들이 합창하는 걸 보고 울컥했어요. 아이들도 너무 뿌듯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가 사는 곳을 위해 연습하고, 노래를 불러 사람들에게 행복을 줬잖아요. 이곳에서 울컥 모멘트가 늘었어요.(웃음)
저도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어린이 자치회나 합창단 같은 활동을 경험시켜주고 싶어요. 그런 것들을 밖에서 경험하려면 양육자가 부지런해야 하고, 돈도 많이 들잖아요. 위스테이에서는 조금만 노력해도 모두 체험할 수 있어요. 전혀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기도 하고요. 여기 살다 보니 작은 행사도 빠짐없이 참여해보고 싶어서 어디서 뭐가 일어나는지 예의주시하고 있어요.(웃음)
라인댄스, 캘리그래피, 반찬/요리 모임… 전부 다요.(웃음) 아이들이 일찍 하원해 참여를 못하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조금 더 크면 그럴 수 있겠죠?
처음엔 몰랐는데 능력 있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다른 아파트에도 물론 그런 분들이 많겠지만, 그걸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잖아요. 굳이 서로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위스테이에서는 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 같아요. 다들 부끄러워할 것 같은데 멍석을 깔아주면 빼지 않기도 하고요.(웃음) 미싱 동아리도 육아 품앗이 모임에서 만난 분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만약 제가 수업을 한다면 경력을 살려 포토샵 강의나 창업과 관련된 내용을 다룰 것 같네요. 이런저런 모임에 참여하고, 직접 기획도 해보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숨겨진 재능이 나오기도 해요.
저도 아동복 나눔을 한 적 있어요. 한 번은 꽁날에 제가 취급하는 아동복을 판매했는데, 다들 너무 좋다고 하는 거예요. 다른 물건도 있는지 물어보시는 분도 계셨고요. 단지 안에서 저희 옷을 입은 아이들이 지나가니까 뿌듯해요. 먼저 알아봐 주시기도 하고요. 종종 먹거리를 판매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함께 사는 조합원들이 하는 거라 믿고 살 수 있겠더라고요.
재밌겠네요.(웃음)
이전의 집에서 층간 소음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그러다 아이가 생기고 나니 그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죠. 위스테이에 입주하고 나서도 꽤나 조심스러웠던 부분이에요. 그래서 아랫집 이웃들께 선물공세를 펼쳤어요.(웃음) 다행히 아이들이니 이해한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아랫집 이웃분들은 앞으로도 종종 층간 소음으로 힘들어하실 테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래서 저의 상황을 알리고, 이웃의 고충을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서로의 출발선이 다르면 소통은 매끄럽지 않을 것이고, 소통의 시작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니까요.
맞아요. 서로의 역사를 세세하게 알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 집 근처에 누가 사는지는 알게 돼요. 옆집에는 할머니가 살고 계신데, 손녀들이 저희 애들과 또래예요. 등 하원하면서도 자주 뵙고요.
한 번은 단지 근처 편의점에서 어떤 부부가 나오시는 걸 봤는데, 아랫집 분들인 줄 알고 인사를 했거든요. 근데 그분들이 아니었던 거죠. 웃으시면서 위스테이에 살긴 사는데 거기는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마스크 때문에 착각을 했나 봐요. 처음 뵌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단지까지 왔던 기억이 나요. 아무래도 인사를 하면 서로의 장벽이 조금씩 낮아지고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요.
최대한 마주하고 대화하다 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인지 아직은 피부로 와닿는 불편이 없어요. 하지만 작고 사소한 불편도 쌓이면 결국 피로감이 되겠죠. 그런 점에서 갈등조정위원회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해당 글은 2020년 11월 30일 사회혁신기업 더함 공식홈페이지에 송출된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