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름, 그리운 시간
나는 충청북도 충주시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났다. 내가 어릴 적, 봄이 오면 먹을 것이 점점 줄어드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겨울 동안 아껴둔 곡식을 조금씩 나눠 먹으며 버텼고, 보리밥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 강냉이죽이 밥상에 오르고, 때로는 강냉이로 빵을 만들어 먹었다. 그마저도 부족할 때는 겨울에 묵혀둔 고구마를 구워 먹거나 생으로 씹어 허기를 달랬다.
국민학교 시절,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함께 줄을 서서 강냉이죽을 배급받아 허겁지겁 먹었다. 미국에서 원조로 들어온 분유도 있었지만, 어떻게 먹는지 몰라 솥에 찌고 덩어리째 갉아먹곤 했다. 지금은 너무나 흔한 음식이지만, 그때는 작은 것 하나도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나는 베이비부머 1세대로, 전쟁이 끝난 뒤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몸을 움직였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공부했다. 국민학교를 마친 후 나는 서울로 올라와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건축기사로서 철근과 콘크리트가 쌓이며 건물이 하나둘 올라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묘한 자부심이 들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보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은 장관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땀과 노력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때 대한민국은 건설 붐이 한창이었다. 국내 곳곳에서 빌딩과 인프라가 세워졌고, 동시에 많은 건설 기술자들이 중동으로 떠났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같은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서 가족과 떨어져 조국의 경제를 일으켰던 산업의 역군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며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모습을 몸소 경험했다.
그 바쁜 삶 속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정숙 씨였다. 우리는 사랑을 키워 결혼했고, 아들과 딸을 낳아 가정을 꾸렸다. 결혼과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내 삶에 또 다른 의미를 주었다.
하루하루가 고되었지만, 가족이 곁에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정숙 씨와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그리며,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정숙 씨가 병을 얻었고, 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려 했지만, 병은 점점 깊어져 갔다. 정숙 씨는 강하고 씩씩했지만, 결국 내 곁을 떠났다.
38년을 함께한 반려자를 보내고 나니, 삶의 중심이 무너지는 듯했다.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출근길에 북적이는 거리도, 퇴근 후 불이 켜진 집도 전과 같지 않았다. 함께했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
"여보, 오늘은 뭐 먹을까?"
"다녀오셨어요?"
이제는 들을 수 없는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정숙 씨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곁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겨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최근 헬스클럽에 등록해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몸을 움직이며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새긴다. 나를 돌보는 일이 이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70년을 살아보니, 인생은 길지만 돌이켜보면 한순간이었다. 굶주렸던 어린 시절도, 뜨겁게 일했던 젊은 날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했던 따뜻한 순간들도 모두 지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함께했던 시간과 마음속에 새겨진 기억뿐이다.
나는 오늘도 정숙 씨를 그리워하며, 남은 날들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채우려 한다. 그것이, 긴 세월을 지나온 지금 내가 깨달은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