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식탁 앞에서 되살아나는 사랑의 기억
오늘은 유독 숨이 막히도록 쓸쓸하다.
마음 한편이 조용히 저려오더니, 어느새 그 쓸쓸함은 집 안 구석구석을 맴돌며 나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특별히 더 서러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유난히 외로운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건만, 이 고요한 저녁은 이상하리만치 무겁고 깊다. 마치 말이 없는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내 어깨 위에 주저앉은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쳐버릴 것만 같은 정적이 방 안을 채우고 있다. 불을 끄고, 아무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도 이 텅 빈 공간은 더욱 어두워지고, 정적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저녁 바람은 어느덧 한층 서늘해졌고, 낮 동안 무심히 내리쬐던 태양의 기세도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군다. 몇 장 떨어진 낙엽이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듯 바닥에 눕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계절의 변화란 것이 이렇게 느닷없이 스며드는구나 싶다. 그 모습 속에서 나는 문득 그녀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인생도, 우리 부부의 삶도 그렇게 계절처럼 흐르고 바뀌며, 사랑과 이별을 품은 채 조용히 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계는 밤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저녁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고요하고, 밤이라 하기엔 아직 조금 이른 듯한 이 애매한 시간에, 나는 그녀가 자주 앉던 식탁의 의자에 혼자 앉아 있다. 오늘도 예외 없이 편지를 쓴다. 어떤 이야기를 전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뇌다가, 조용히 태블릿을 켜고 오래된 발라드 음악을 틀어본다. 피아노 반주에 실려 흘러나오는 잔잔한 멜로디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새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부부였다. 젊은 날 만나 서로에게 기대며 가정을 이루고, 아들과 딸을 낳아 키우며 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세상살이가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때때로 고된 날도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뭐든 견딜 수 있었다. 다투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렇게 때론 고요하게, 때론 분주하게 흘러간 우리 삶이 지금 와서 돌아보면 참 따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마지막 몇 해는, 그 따뜻했던 삶의 결을 차마 버틸 수 없을 만큼 흔들리게 했다. 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통이 삶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결국 그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갔다.
그 후로, 나는 늘 이 식탁 앞에 앉는다. 아무도 마주 보지 않는 자리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노트북을 켜고, 손가락으로 자판을 더듬으며 그녀를 향한 말을 써 내려간다. 쓸쓸하고 애틋한 이 마음을 글로 다 옮길 수는 없겠지만, 그저 이 시간을 지나기 위해,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그렇게 한다. 저녁이 되면 세상 사람들은 부부가 나란히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밥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제 그런 일상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더 아프게 다가온다.
낮이 오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잠드는 단조로운 생활.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상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때는 우리도 분명히 약속을 나눴었다. 손을 꼭 잡고 공원을 산책하며, 노후가 되어도 이 손을 놓지않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으며 함께 웃으며 살자고. 그 소박하고 따뜻한 꿈은 이제 사진 속의 장면처럼 아득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그녀가 떠난 뒤로 내 삶은 달라졌다. 내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고, 음식은 더 이상 맛이 없으며, 하루의 기쁨과 설렘 같은 감정들은 더는 찾아오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지만, 그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은 희미하다. 그저 버티는 삶, 숨 쉬는 하루. 그것이 지금의 나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온다. 사람들은 그걸 울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단지 눈물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새어 나오는 가장 원초적인 그리움의 파편이다. 그것은 한숨이 되어 터져 나오기도 하고,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 흐느낌으로 밤을 적시기도 한다.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 소리는 자꾸만 내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편지를 멈추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고, 언젠가 다시 가을이 찾아오더라도, 그녀가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한 나는 계속 이 자리에 앉아 편지를 쓸 것이다. 비록 손이 느리고 자판이 서툴더라도, 그 속에 담긴 사랑만은 흐려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이렇게 조용한 저녁,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낸 사랑을 한 글자씩 눌러 담는다. 282번째의 이 편지가 어딘가 그녀에게 닿기를, 그리고 내일 또다시 그리워할 수 있는 하루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정말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