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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데려다준 길

절기가 알려주는 계절의 문턱

by 시니어더크


물러서는 더위 끝에, 바람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가을이 오고 있어요."

숨을 막히게 하던 여름이 뒤로 물러나자, 바람은 부드럽고 선선하게 다가와 내 뺨을 스쳤다. 몸이 먼저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렸고, 마음은 그 바람 속에서 어느새 그녀를 불러냈다.


입추가 지나자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한여름 내내 숨을 막히게 하던 열기는 서서히 밀려나고, 그 자리를 부드럽고 선선한 기운이 채우기 시작했다. 햇살은 여전히 강했지만, 바람은 이전과 달랐다. 창문을 열자 달아오른 실내의 공기를 밀어내듯 신선한 바람이 들이쳤고,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절기는 참 묘하다. 달력 속 날짜보다도 먼저,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바람의 밀도, 햇빛의 각도, 나뭇잎의 색이 조금씩 달라지고, 문득 귀를 스치던 매미 소리가 어느 날엔 조용해졌다는 걸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계절이 저만치 건너편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옛사람들은 해와 달, 구름과 바람, 풀잎의 빛깔과 곤충의 울음소리만으로도 절기를 읽었다. 그들은 수천 번 되풀이된 자연의 순환 속에서 흐름을 발견하고, 변화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매일 기상청 예보를 보고 스마트폰으로 온도를 확인하지만, 그 섬세한 감각만큼은 따라가지 못한다. 과학이 발전했지만,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귀는 어쩌면 그때보다 퇴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살던 시절, 입추가 다가오면 우린 늘 같은 말을 나누곤 했다. "공기가 많이 달라졌네요." "이럴 땐 여행 가야 하는데." 몇 번이나 약속했지만, 현실은 쉽게 우리를 풀어주지 않았다. 건강 문제가 우리들의 약속을 방해했고, 우린 미뤄두기 바빴다. 언젠간 꼭 가자며 몇 번이고 마음을 다졌지만, 끝내 그 약속은 실행되지 못한 채 먼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은 다시 꺼낼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함께 계획을 세울 상대는 없고, 그 자리엔 그리움만이 남아 있다.

구름이 햇살을 가린 오후, 나는 아들과 딸, 그리고 쿠키와 함께 그녀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 아이들도 이날만큼은 기꺼이 시간을 비워주었다. 쿠키는 작은 다리로 앞서가며 코를 바닥에 대고 분주하게 움직였고, 우리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맑고 시원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속까지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이맘때면 우리는 종종 동네를 산책하곤 했다. 특별한 목적이 없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런 계절의 공기를 함께 느끼고, 하늘을 함께 바라보고, 나란히 걷는 것이 좋았다. "가을이 오니까 하늘이 높아졌네요." "이 바람, 딱 좋아요." 그런 짧은 대화 속에 우린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오늘은 입추다. 마음으로 꽃집에 들러 그녀가 좋아하던 색을 떠올리며 꽃다발을 고르고, 하나하나 포장지도 정성껏 골랐다. 그렇게 하나의 약속처럼 마음을 준비했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푸르다. 양옆으로 이어진 나무들은 서로 가지를 뻗어 터널을 이루었고, 그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살짝 노란 기운을 띠고 있었다. 늦여름의 고요함이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있었고, 하늘은 유난히도 높고 파랬다. 흰 구름은 느릿하게 흘렀고, 산책 나온 이들의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이상하리만치,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엔 늘 날씨가 맑았다.


도착해 보니, 그녀 곁에 있는 작은 꽃병 두 개엔 막 갈아놓은 듯한 조화가 싱싱하게 놓여 있었다. 아마도 조카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그 정성이 고마웠다. 우리는 준비한 생화 꽃다발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나란히 서서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감고 조용히 마음을 전했다. "오늘은 우리 모두 왔어요. 날씨가 참 좋네요. 당신이 좋아하던 공기예요."

기도를 마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는 여전히 푸르렀지만, 바람은 가을의 언저리에 가까워져 있었다. 곧 이 숲도 단풍으로 물들 테지. 그때가 되면 그녀도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단풍 진 앞산을 내려다보며,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녀는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이날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녀를 만나고 나면, 우리 셋은 함께 저녁을 먹는다. 그녀가 머물던 그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평소엔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이 날만큼은 우리 셋이 같은 자리에 앉아 식탁을 마주한다. 비어 있는 그 자리는 늘 그녀를 위한 자리로 남겨두고.


오늘은 옥정동의 '대구 남다른 막창'에 들렀다. 제법 값이 나갔지만, 마침 남아 있던 민생복지 쿠폰 덕분에 부담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소곱창과 막창을 구워 입에 넣으며 문득 그녀 생각이 났다. 매운 걸 잘 못 먹었던 그녀는 항상 소금구이만 찾았다. 함께 식사를 하다 "이건 좀 맵다" 하고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딸아이는 "엄마는 이거 못 드셨겠네" 하고 말했고, 아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식탁 위로 그리움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은 여전히 선선했다. 해는 지고 있었고,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위로 구름이 가만히 걸려 있었고, 나는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계절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의 중심에서 또다시 그녀를 떠올렸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그리움도 함께 깊어진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바람과 하늘과 꽃,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한 시간들이 나를 위로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음 달, 나는 다시 그 길을 걸을 것이다. 쿠키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변함없이 그녀를 만날 것이다. 말없이 손을 내밀던 그녀, 그 손길을 다시 느끼고 싶은 날들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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