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나는 앞서지 않았다

아이들의 걸음에 맞춰

by 시니어더크



인천공항 제1터미널 출국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아들과 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며 쏟아져 들어온 밝은 빛과 금속성의 공기 속에서, 아이들의 발걸음이 먼저 앞서 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무심코 내가 앞장서 걸었을 거리였지만, 그날은 순서가 조용히 바뀌어 있었다. 누가 먼저 나서자고 말한 적도 없고 역할을 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길을 열었고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 모습이 조금도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오래 묵은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마음 한쪽이 은근히 풀려났다.


공항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그 사실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오히려 오래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마음 한쪽이 느슨해졌고, 어깨에 얹혀 있던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앞서야 한다는 마음, 먼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습관이 그날만큼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고, 그저 지금의 이 위치를 받아들이는 일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그날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특별한 다짐도, 거창한 각오도 없이, 다만 앞서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는 걸음으로. 나는 아이들의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고, 그 등 뒤에서 비로소 여행자라는 이름이 나에게도 조용히 붙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다. 여행 일정과 항공편, 환승 정보는 모두 그들이 정리해 두었다. 나는 여권과 비행기 탑승권을 손에 쥐고, 필요한 순간에 건네는 역할만 하면 되었다. 출국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굳이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확인했을 사소한 일들이 그날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편안함을 주었다. 이미 누군가가 충분히 준비해 두었다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은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르고, 한 걸음 뒤에서 걷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함께 살아온 수많은 날들 속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쌓여 온 것이었다. 그날 공항에서 나는 비로소 알았다. 내가 뒤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것은 물러섬이 아니라, 믿어도 된다는 조용한 깨달음이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면세 구역으로 들어서자 공항 특유의 넓고 환한 공간이 다시 펼쳐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목적지를 향해 흩어지고 있었고, 각자의 표정과 속도를 안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우리 셋은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들은 안내 표지판을 먼저 살폈고, 딸은 내 걸음이 뒤처지지 않는지 슬쩍 돌아보았다. 그 시선 하나에 괜히 마음이 놓여,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그 짧은 눈 맞춤만으로도 충분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오래된 관계 안에서, 그날은 분명히 다른 결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앞서 걷는 쪽과 뒤따르는 쪽이 자연스럽게 나뉘고, 서로의 자리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말로 꺼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변화가, 조용히 우리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비행기에 오르자 기내의 불빛은 한결 낮아졌고, 엔진 소리는 일정한 박자로 공간을 채웠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먼저 짐을 정리하고 자리를 살폈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활주로의 불빛이 천천히 뒤로 밀려나고, 비행기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 움직임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먼저 내려놓은 것은 ‘앞서야 한다’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그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잠시 나를 멈춰 세웠다. 오래 붙들고 살아온 역할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는 순간처럼, 기내의 어둠 속에서 내 자리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기내에서의 시간은 길고 조용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나는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기내등과 일정한 엔진 소리는 시간의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다.


예전의 여행에서는 도착지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면, 이번에는 무사히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어디에 닿을 것인가 보다, 지금 이 시간 속에 있다는 감각이 먼저 다가왔다.


목적지보다 과정이 먼저 와닿는 여행이라는 것을, 그 긴 공중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이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속도였는지도 모른다.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날이 새는지 지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가 뒤섞인 하늘이었다. 그 모호한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용히 생각했다.


부모로서 앞장서던 시간들, 결정하고 책임지던 무수한 날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역할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것을, 앞서 걷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서운함이 아니라 안도감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나 자신도 잠시 멈춰 서게 되었다.


도하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지 않은 시간이었다. 넓은 터미널 안에는 여러 나라의 언어와 얼굴이 뒤섞여 있었지만, 묘하게 차분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곳은 한국도 아니고 아직 유럽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놓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환승 통로를 따라 걸으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방향을 잡았고, 나는 그 뒤에서 그저 걸음을 맞추었다.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도, 시간을 놓칠까 하는 걱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아이들이 이미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감각이 이렇게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비로소 실감했다.


환승 대기 구역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낮은 조명과 낯선 공항의 냄새, 이른 시간임에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은 고요했다.


부모로서 무언가를 챙기고 책임져야 한다는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여행자라는 단순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하공항의 긴 통로만큼이나 오래 마음에 남았다.



대기 시간 동안 딸이 커피를 사 왔다. 뜨거운 컵을 손에 쥐고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아들은 다음 비행기의 탑승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조용했다.


누가 누구를 돌본다는 느낌보다는, 우리 셋이 하나의 작은 팀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이 더 가까웠다. 그 안에서 나는 더 이상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가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이번 여행을 한결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로마행 비행기의 탑승구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직 로마의 풍경은 눈앞에 없었고,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여행은 충분히 시작된 상태였다.


아이들은 조용히 탑승 안내를 확인했고, 나는 그 옆에서 기다렸다. 앞서야 할 이유도, 서둘러야 할 마음도 없었다. 그날의 여행은 그렇게, 아이들 뒤를 따르는 걸음으로 조용히 방향을 잡고 있었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줄을 서기 시작했다. 우리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들이 탑승권을 확인하고, 딸이 가방을 챙기는 동안,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다시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이들의 뒤를 따라 걷는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부모라는 이름 대신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조용히 다음 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