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도착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의 자리
도하공항을 떠난 것은 아침 아홉 시 무렵이었다. 탑승은 8시 반부터 시작되었고, 비행기는 인천에서 타고 왔던 것과 같은 항공사였다. 이곳의 경유지가 카타르이니 당연히 카타르 항공을 이용하는 것이 순서일 텐데, 그것이 필연이었는지 혹은 아이들이 우연히 시간표가 맞아 예약한 것인지, 뒤따라가는 입장에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함이 스쳤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면 곧장 연결되는 복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몇 개의 계단을 조심스레 돌아 내려가야 했다. 아래쪽에는 공항 활주로를 왕복하는 전용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몇 번에 나누어 실어 나르던 버스는 활주로 한가운데 멈춰 서더니 비행기 탑승 계단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순간, 마치 외국 순방길에 오른 대통령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겹쳐 보였다. 우리도 그 계단을 한 발 한 발 밟으며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좌석을 찾는 동안 좌석 위 화물칸을 살폈다. 조금 늦게 탑승한 탓인지 여유가 많지 않아 짐을 두 군데로 나누어 실어야 했다.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 기내를 천천히 둘러보니, 인천에서 탔던 비행기보다 훨씬 깨끗하고 전반적으로 새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체가 오래되지 않은 듯했고,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긴 여정을 이어가는 사람에게 기내의 상태가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컸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도하의 환한 아침빛이 아직 창 너머에 고요히 남아 있었다. 경유지라는 낯섦 속에서도, 아이들을 따라 떠나는 이번 여행의 리듬이 이제야 비로소 몸에 스며드는 듯했다. 출발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조금은 긴장시키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딘가 단정하고 담백한 기대가 조용히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밀고 나가더니 이내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좌석에 깊이 몸을 맡긴 채 창밖을 바라보니, 도하의 바다는 아침빛을 받아 고요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모래빛 사막 사이로 정연하게 선 건물들이 길게 뻗어 있었고, 바다와 사막이 맞닿는 국경처럼 도시가 얇게 자리 잡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중동의 이미지가 실제 풍경과 겹치며 묘한 낯섦을 남겼다.
도시는 곧 시야에서 작아졌고, 창밖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점점 멀어졌다. 그 순간 문득, 아침에 출발해 낮에 도착하는 여정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밤새 비행기 안에서 보내던 피곤한 여행과 달리, 이번에는 햇살을 따라 이동하는 일정 덕분인지 몸이 개운했다. 나이가 들수록 여행은 설렘보다 피로를 먼저 헤아리게 되지만, 그날만큼은 아직 여백이 남아 있었다. 칠순의 나이에 대륙과 바다를 또렷한 정신으로 건너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조금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비행기의 뒤쪽, 창가 쪽 세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 기종은 셋‧넷‧셋 배열이라 창가를 선호하는 우리의 자리 선택은 늘 비슷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익숙한 배치가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아내와 아이들이 나란히 앉고, 나는 한 칸 비켜 앉아 셋의 거리를 자연스레 맞추어 주었을 것이다. 장거리 비행에서 늘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이번에는 내가 앉아 있었고, 그 사실이 가볍게 숨을 흔들어 놓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순간, 떠오르려는 기억을 다 누르기도 전에 마음 한쪽이 조용히 흔들렸다.
기내 조명은 은은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이 객실 안을 고르게 적셨고, 장거리 비행 특유의 묵직한 공기 속에는 금속과 세제 냄새가 아주 옅게 섞여 있었다. 승무원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고, 한 사람의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쪽에서 기내 준비를 알리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익숙한 절차가 반복되는 그 흐름 속에서, 이 여행이 '아내 없이 처음 맞는 비행'이라는 사실이 한층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 부재는 소리 없이 기내 전체를 감싸는 공기처럼 은근하게 퍼져 마음에 머물렀다.
창밖에서는 구름의 층이 낮게 내려와 있었고, 햇빛은 그 사이를 촘촘히 파고들어 흐리게 반짝였다. 하늘은 깊은 가을빛이었고, 그 푸름이 기내의 고요와 묘하게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들이 배식 준비를 시작했다. 카트가 복도를 따라 조용히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고, 금속 식판이 부딪히는 미세한 진동이 좌석 등받이에 전해졌다. 음식 냄새가 공기 속에 살짝 퍼지자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실감이 서서히 가슴에 차올랐다. 만약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메뉴를 함께 들여다보며 작은 농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 사소한 장면들이 이번 여행에서는 공백으로만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로마에 도착해서 움직일 경로를 작은 목소리로 다시 점검하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보며 서로의 계획을 확인하는 모습은 침착하고도 분명했다. 짐은 어느 역에서 맡길지, 첫 동선은 어디에서 시작할지, 표를 언제 끊을지까지 이미 머릿속에 정리가 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대화에 굳이 끼어들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예전에는 내가 앞장섰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나를 이끌어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든든하면서도 어딘가 가슴을 서늘하게 스치는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기내에는 한국 사람들도 가끔 눈에 띄었고, 우리 바로 뒤 좌석에는 나이가 지긋한 수녀님 두 분이 앉아 계셨다. 유쾌하거나 크게 말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고요한 수녀복의 분위기 속에서 두 분의 목표는 단단해 보였다. 희년이라 바티칸을 찾는다는 말은 어쩐지 오래된 순례자의 숨결을 떠올리게 했다. 그분들의 조심스러운 설명 속에서 로마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기도의 끝, 사유의 목적지라는 사실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비행기는 곧 로마 하늘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하의 뜨거운 태양에서 시작된 하루가, 이제 오래된 대륙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