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섬을 떠나, 황금빛 밤의 광장으로
색의 도시 부라노섬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배에 올랐다. 구경을 조금 일찍 마친 덕분인지 배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그렇다고 앉을자리가 넉넉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선장실 문 앞에 서서 가는 자리를 택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선창 밖으로 시야가 탁 트여 있었고, 배가 움직일 때마다 갈라지며 뒤로 흘러가는 물결과 잔잔한 라군의 풍경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자 잔잔한 수면 위로 길게 흰 물길이 열렸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우리가 걸어 다니던 부라노의 집들이 점점 작아지며 멀어지고 있었다. 분홍과 노랑, 초록과 파랑으로 칠해진 집들은 물 위에 흔들리는 색의 그림처럼 보였다. 골목 사이에서 마주하던 그 화사한 색들이 이제는 하나의 풍경이 되어 천천히 시야 속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배를 이끄는 선장은 여자분이었다. 둥근 운전대를 자연스럽게 돌리며 항로를 잡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잔잔한 수면이었지만 물길은 끊임없이 미묘하게 흐름을 바꾸고 있었고, 그녀의 손은 그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는 듯했다. 아마도 이 길을 이미 수없이 오갔을 것이다. 선장실 앞에 서 있던 나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전대를 능숙하게 돌리는 손놀림에는 오랜 시간 쌓인 경험이 배어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이 물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배는 푸른 물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 마침내 베네치아 본섬의 선착장에 닿았다. 여객선 안에 있던 사람들은 차례로 배에서 내려섰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여행자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섞어가며 선착장 위로 흩어졌다. 우리도 그 흐름에 따라 배에서 내려 아침에 지나왔던 길을 거꾸로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몸이 몹시 피곤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동안의 움직임이 조용히 쌓여 있었다.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잠깐 쉬기로 했다. 아들과 딸, 그리고 나는 각자 침대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일정이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다음 일정을 계획해 두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중심이라 불리는 산마르코 광장을 밤에 둘러보자는 것이었다. 낮의 광장도 물론 아름답겠지만, 밤이 되면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줄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설레기 시작했다. 밤의 산마르코 광장은 어떤 모습일까. 오래된 도시의 시간이 밤의 빛 속에서 어떤 풍경으로 드러날지 문득 궁금해졌다.
산마르코 광장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 가운데 하나인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그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해가 이 도시로 옮겨져 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산마르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광장과 성당, 그리고 주변의 건물들까지 모두 그 이름 아래 이어져 있다. 이곳은 말 그대로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심장이라 할 만한 장소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의 산마르코 광장은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눈부신 화려함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도시가 켜 놓은 은은한 황금빛 불빛이 광장 위에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넓은 돌바닥 위로 내려앉은 빛은 마치 오래된 극장의 무대 조명처럼 부드럽게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광장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천천히 걸으며 건물들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광장 바닥에 앉아 밤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그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이미 식당을 예약해 두었고 길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길을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골목에는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고, 점포마다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가게에는 베네치아의 가면들이 화려한 색으로 걸려 있었고, 또 다른 가게에서는 섬세한 유리 세공품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금빛과 은빛 장식이 달린 가면들은 창문 너머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이름 모를 빵과 초콜릿을 파는 작은 가게들도 눈에 띄었다. 달콤한 향기가 골목 사이로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예약해 둔 식당에 도착했다. 안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지만 우리의 자리는 따로 비워 두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메뉴를 천천히 살폈다. 이탈리아 음식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몇 가지를 골라 주문했다. 잠시 후 붉은빛이 감도는 칵테일 세 잔이 먼저 테이블 위에 놓였고, 이어 따뜻한 빵이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뒤 음식들이 하나씩 차례로 등장했다. 이름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맛은 훌륭했다. 낯선 재료와 향신료들이 입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이곳의 시간을 은은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산마르코 광장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보다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었고, 많은 이들이 광장 주변의 카페로 모여 있었다. 우리도 오래된 카페 하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3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곳이라고 했다. 카페 중앙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대여섯 명의 악사들이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은은한 음악이 밤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광장 건너편에도 비슷한 카페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이 오래된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오랜 시간의 무게가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에스프레소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음료를 주문했다. 테이블 위에는 보기에도 아름다운 케이크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쌉싸래한 향이 입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300년 전에도 누군가가 이 자리에서 같은 커피 향을 맡으며 이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우리 곁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광장에서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커피 향과 음악, 그리고 밤공기가 어우러져 베네치아의 밤을 조용히 채워가고 있었다.
5박 6일 동안 우리는 로마와 포지타노, 소렌토와 폼페이, 나폴리, 그리고 베네치아까지 여러 도시를 지나왔다. 도시마다 흐르는 시간의 결은 서로 달랐지만, 그 안에는 모두 오래된 중세의 흔적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이 밤이 지나면 우리는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나게 된다. 음악이 흐르던 이 광장과 커피 향이 감돌던 이 밤의 풍경도 이제는 하나의 기억이 되어 마음속에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비행기에 올라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 취리히로 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