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속에서 더 깊어진 풍경, 그린델발트의 하루
스위스 그린델발트의 숙소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우리는 굳이 무리하지 않기로 마음을 모았다. 전날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항에서 스위스 항공기에 몸을 싣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취리히에 도착한 뒤, 다시 자동차를 렌터 하여 이곳까지 이어진 긴 이동의 여정이 몸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곧장 융프라우 산을 오를 예정이었으나, 이탈리아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피로를 안은 채 서두르는 일은 오히려 여행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흐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늘 하루만큼은 욕심을 내려놓고, 발걸음을 늦춘 채 숙소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눈에 담기로 했다.
꿈에 그리던 나라, 스위스. 나 홀로가 아니라 아들과 딸과 함께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 깊은 곳을 울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은 낯설면서도 경이로웠고, 그 아름다움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밀도로 다가왔다. 어느 한 곳도 대충 스쳐 보낼 수 없을 만큼 정갈하고 또렷했으며, 마주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물 것처럼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아니, 오늘만큼은 스위스 알프스도 식후경이라 해야 할 듯하다. 아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쉽게 드러내지 않던 요리 실력을 이곳에서 마음껏 펼치듯,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한 끼를 차려냈다. 낯선 유럽에서 그 나라의 분위기에 맞게 식탁을 꾸려 먹는 일은, 풍경을 눈으로 감상하는 즐거움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여행의 기쁨이었다. 다행히도 모두의 입맛에 잘 맞아 식탁 위에 오른 음식들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고, 빈 접시들은 하나둘 식기세척기 안으로 들어갔다. 버튼을 누르자 기계는 물을 뿜으며 스스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세 시간쯤 지나면 말끔히 정리되어 있을 터였다. 우리는 그 시간을 믿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설 채비를 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우리는 나무로 된 실내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연초록빛 초원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조용히 마음을 끌어내렸다. 그 빛은 단순히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숨결까지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병원의 수술실이 온통 초록색으로 채워져 있는 까닭이 환자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라는 말을 떠올리니, 그 이유를 굳이 설명으로 이해할 필요조차 없을 듯했다. 이곳의 초원은 그 어떤 말보다도 직접적으로 마음을 어루만지며 편안함을 건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만 바라보는 색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이마시는 숨과도 같은 색이었다.
지난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어졌던 아내의 투병은 결코 나 혼자만의 헌신으로 견뎌낸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 또한 온 마음과 온몸을 다해 엄마의 곁을 지켰고, 우리 가족은 하나로 굳게 뭉쳐 병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함께 서 있었다. 그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뒤로 미룬 채 지내야 했고, 결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다. 말로 다 꺼내지 못했을 그 무게와 마음의 결들이, 이 푸른 초원 위에 서서야 비로소 조금은 가벼워졌을지도 모른다. 마치 오래 눌려 있던 감정이 서서히 풀리듯, 아주 부드럽고도 느린 속도로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듯이.
가을의 스위스 하늘에는 한때 하얀 구름이 머물며 풍경을 잠시 가리고 있었지만, 이내 그것이 흘러가고 청명한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초원을 바탕으로 저 멀리 설산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고, 그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또렷하게 펼쳐졌다. 우리가 걷는 길 양옆에는 소들이 목에 단 종을 은은하게 울리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는데, 그 잔잔한 소리는 마치 시간의 흐름마저 느리게 만드는 듯했다. 우리는 숙소인 샬레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남겼고, 입구에 놓인 의자와 탁자에 앉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 모양의 조각 하나가 서 있었는데, 마치 이곳을 찾는 이들을 조용히 맞이하는 수호자처럼 느껴졌다.
멀리 아이거 북벽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건너편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은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고요하고도 또렷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 그린델발트는 양쪽 능선을 따라 전통 가옥인 샬레들이 점점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배치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채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완성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우리는 중심 시가지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운전은 딸이 맡았고, 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목적지까지는 불과 5분 남짓, 짧지만 그마저도 아깝게 느껴질 만큼 주변 풍경은 계속해서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그린델발트 중심지로 향해 차를 몰고 가는 길목에는 역이 자리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철도 건널목 앞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 기차가 지나가고 있어 우리는 차를 세운 채 잠시 기다려야 했다. 그 짧은 멈춤 속에서도 시선은 분주히 움직였고, 머리 위로는 곤돌라가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공중을 가로지르는 그 모습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일상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고도 인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린델발트 터미널에서 아이거글레처까지 이어지는 이 곤돌라는 융프라우로 오르는 가장 빠르고 편리한 길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건널목을 지나 중심 시가지로 들어서자 스위스의 대표 마트인 COOP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는 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시내를 둘러보았다. 주차장은 물론 유료였지만, 이곳에서는 그러한 조건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스위스의 풍경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에 가까웠지만, 단 한 가지—물가는 실로 놀라울 만큼 높았다. 스위스 프랑을 사용하는 이곳에서의 가격은 우리나라에서의 체감과 견주어 보면 몇 배는 더 크게 다가왔고, 일상의 사소한 소비조차도 쉽게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데에도 1프랑에서 1.5프랑을 지불해야 했고, 주차비 또한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비용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이곳까지 와서 아끼는 마음에 머뭇거리기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시간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중심 시가지를 천천히 거닐며 점심을 나누었고,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짧은 여유마저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풍경처럼 깊이 있게 마음에 스며들고 있었다.
해발 1000미터를 훌쩍 넘는 이곳에서는 융프라우의 만년설이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보였다. 도로 양옆으로는 꽃으로 정성껏 장식된 스위스식 건물들이 이어졌고, 그 하나하나에는 주인의 손길과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듯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음을 늦춘 채 천천히 이동하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담아내려 했다. 버스 터미널 뒤편으로 보이던 눈 덮인 봉우리와, 관광객을 맞이하듯 단정하게 꾸며진 상점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완결된 풍경처럼 조화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걷다가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나란히 앉아 밖을 바라보며 각자의 취향에 맞는 음료를 주문했고, 잠시 후 손에 쥔 따뜻한 잔이 그 순간의 온도를 더해 주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서양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고요하고도 또렷하게 다가왔다. 맑게 개인 날씨까지 어우러지니 여행의 모든 순간이 더없이 완전하게 느껴졌고, 그 풍경 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입가에는 말없이 번지는 잔잔한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언덕 아래로 걸음을 늦추어 천천히 내려가며, 목에 단 종을 은은하게 울리는 소들의 곁을 지나갔다. 건너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을 숙소를 눈으로 찾아보았지만, 거리가 제법 있어 또렷하게 구분해 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조차도 아쉬움으로 남기보다는, 오히려 이곳의 풍경 속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장면이 서두르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온함에 잠겨 들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도 평화로웠다.
길가의 기념품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천천히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마음에 드는 물건 몇 가지는 조심스럽게 골라 구입하기도 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은 길 위에서 목을 축이기 위해, 로마에서 즐겨 먹던 젤라토를 다시 손에 들었다. 익숙한 맛이 낯선 공간 속에서 새롭게 스며들며, 여행의 기억들을 자연스럽게 이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린델발트의 중심 시가지를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남기고, 커피를 마시고, 소소한 간식을 나누는 하루를 보냈다.
꽃으로 정성껏 단장된 건물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나도 이런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손길을 더하면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의 건물들은 왜 이토록 무심하게 세워지는 것인지 하는 아쉬움이 조용히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COOP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장만했다. 요리는 자연스럽게 아들이 맡을 것이고, 딸과 함께 넓은 매장을 천천히 돌며 필요한 식재료들을 하나씩 골라 카트에 담았다. 이곳의 카트는 1프랑짜리 동전을 넣어야 사용할 수 있었는데, 사용을 마치고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다시 동전이 반환되는 구조였다. 사소한 방식 하나에도 질서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매장을 둘러보는 동안 흥미로운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동양인처럼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국말이 낯설지 않게 귓가에 스며들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익숙한 언어를 듣게 된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모습을 보니, 우리나라 역시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해가 서서히 기울 무렵,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산봉우리 위에는 황금빛 햇살이 마지막 온기를 남기듯 내려앉아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고,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은 하루의 끝을 차분히 알려주고 있었다. 숙소 앞 공터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서성이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곁을 내주었다. 아이들과 잠시 어울려 그 작은 생명과 시간을 나눈 뒤, 우리는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생김새는 조금 달라도, 고양이라는 존재가 주는 익숙함은 어느 나라에서든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 소소한 친근함이 오히려 하루의 끝을 더욱 편안하게 감싸 주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드디어 융프라우 산을 오른다. 만년설이라 불리는 그곳의 눈을, 내 두 발로 직접 밟게 될 것이다. 긴 여정 끝에 마주하게 될 그 풍경을 떠올리니 가슴 한편이 잔잔히 설레어 온다. 어쩌면 오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설렘마저도 여행의 일부라 여기며, 조용히 내일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