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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으로 용서가 가능할까요?

마음의 찌꺼기가 녹으려면

by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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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청소기를 돌렸는데도 거실 바닥에 이물질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다시 청소기를 밀었다. 그래도 이물질들이 그대로 있었다. 청소기의 먼지통에는 오염물질이 많지는 않았지만 왜 청소가 제대로 안 되는지 살펴보니, 그제서야 청소기 흡입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청소기를 분해해서 먼지를 털어냈다. 먼지만 털어내면 흡입력에 별반 차이는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이물질은 청소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청소기를 완전 분해했다. 아무리 기계치라지만 청소기정도는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저것을 돌리고 열고 하다 보니 몇 가지가 분해되었다. 청소기에는 온갖 오염물질들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면 다 분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세제와 솔을 이용해서 물로 씻어냈다. 필터기능을 하는 검은색 스펀지 부분도 열심히 씻었다. 그리고 깨끗이 말려서 다시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기 안의 모든 이물질과 먼지들을 다 제거했다고 생각하면서.


어느 날 다시 청소기의 먼지통에 먼지가 쌓여,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청소기를 분해하고 씻고 있는데, 어느 순간 툭 하고 필터와 부속품이 분리되었다.

이럴수가!. 이 필터도 분리가 되는 거였는데, 그걸 모르고 더 이상 분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씻는 참이었다.

청소기를 구입 후 몇 년동안 쌓인 필터안쪽에는 가루로 된 먼지와 머리카락이 잔뜩 붙어 있었다. 필터안쪽에 그 정도로 먼지가 쌓여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청소기 흡입력의 문제는 필터에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매번 청소기를 열심히 분해하고 씻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청소기를 분해하고 씻는다한들, 필터를 제대로 씻어주지 않으면 흡입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내부 깊숙한 곳에 쌓여있는 먼지는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쉽게 씻기도 힘들다. 청소기 기능의 핵심인 필터를 제대로 씻지 못하고 생활하는 게 비단 청소기 뿐이랴.


나는 제대로 한다고 믿고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인간관계에서도 다 털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마음의 필터에 쌓여있는 찌꺼기는 그대로 방치해두고 사는 건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군가와 사소한 일로 사이가 벌어졌지만 ‘화해를 했다’ 고 생각하며 십 수 년을 상처를 안고 살았다. 그것은 표면적인 화해였고, 마음 저 아래의 필터에 쌓여있는 찌꺼기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곪아서 고름이 되어 터져버렸다. 그 이후로는 휴전상태가 되었고, 휴전선은 더 견고해졌다.


마음의 상처, 마음의 찌꺼기는 안쪽 깊숙한 곳까지 털어내야 가벼워지는데, 심리치료, 대화를 통한 화해로서는 깊숙한 상흔까지 치유되기란 어렵다. 몸의 외부에 난 상처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큰 상처는 상흔은 남아있다. 그런데 마음에 난 상처는 세월이 지나도 해소되지는 않는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방과 깊은 화해가 일어나지 않는 한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평생 가는 것 같다.


겉으로만 화해를 해서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의 필터에 쌓여있는 찌꺼기를 씻어야 하는데 그 청소작업은 서로가 함께 씻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쪽에서만 씻으려고 한들 다른 쪽에서는 아무 생각이 없으면 마음의 찌꺼기는 평생 간다. 단지 그 찌꺼기를 수면 아래에 그대로 두고 조심해서 상대방을 대하든지, 아예 흔들지 말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가라앉아있던 찌꺼기가 우물전체를 흐려버린다.


평소에 몸이 여기저기 아픈 것도 여러 가지로 상처난 마음의 필터를 제대로 씻어주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50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내 몸은 종합병원 수준으로 몇 가지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40대 초반부터 삶의 파도를 타느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온갖 곳을 다녔다. 피정을 다녀오면 뭔가 가슴의 청소를 한 것 같은 느낌은 들었다. 실제로 신체적 증상도 변화가 있었으니까. 가톨릭 뿐만 아니라, 불교쪽 템플스테이, 깨달음의장, 단월드 특별심신수련, 심리상담 최면치료까지 받아왔다.


살면서 어떤 상처를 받았을 때, 화해를 하기도 하고, 마음속에 묻어두고 세월이 흐르기를 냅두기도 한다. 그런데 이성적으로는 화해를 했고, 용서를 했다고 해도 가슴 깊숙한 감정의 찌꺼기는 쉽게 녹지 않는다. 청소기는 해체해서 찌꺼기를 제거해주면 되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곳 찌꺼기는 누가 빼 줄 수가 없다. 물론 심층적인 심리치료나 최면치료 등을 통해서 치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외부로부터의 치료다. 마음의 치료는 스스로가 깨달음의 경지가 되어야 가능하다.


진정한 상처치유는 성경 창세기의 요셉을 통해 보았다. 요셉은 하느님의 섭리대로 자신을 버린 형들이 생존을 위해 자신에게 엎드려 구걸할 때, 형들과 통곡하며 울 때 눈물로써 가슴의 상처가 치유되었다. 요셉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는데도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당사자의 진정성있는 회개 앞에서 함께 통곡할 때, 그 눈물이 마음의 상처까지 씻어내 주었다. 요셉은 하느님의 섭리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상처를 준 당사자들의 처절한 통회가 있었기에 용서와 상처치유가 가능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깨우침이나, 정신의 성장을 통해서 그 찌꺼기를 조금씩 녹여갈 수 있다. 어쩌면 죽기 전까지도 그 찌꺼기를 녹여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도로서 끊임없이 찌꺼기를 녹여낼 때, 조금씩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서야 상처준 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용서 근처 정도는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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