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엄마에게 한번도 no라고 하지 않은 이유
내 유년의 기억에 엄마는 머리 손질할 때 유난히 앞머리로 이마를 정성스레 덮었다. 파마머리를 손으로 동그랗게 말아서 오른쪽으로 고정했는데, 예쁜 헤어스타일로 꾸민다고 생각했다.
“이 흉터를 어찌 좀 없애면 좋겠는데.”
어느 날 우리 집에 온 팔순의 엄마가 이마를 내게 보이며 망설이는 듯 살짝 물었다. 자세히 보니 주름살과는 차이가 나는, 오른쪽에 밥알 크기만한 거무스럼한 흉터가 있었다. 그때 엄마의 앞머리 손질은 상흔을 덮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딸로서 여태껏 그걸 몰랐다는 무심함과 미안함으로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 아! 흑백 티브이처럼 희미하게 나도 기억나는 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 저학년이었을 때 평소에는 과묵했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순식간에 재떨이를 던졌는데, 엄마는 피할 겨를도 없이 그만 이마를 맞았다. 비명을 지르고 얼굴을 감쌌지만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엄마는 울면서도 스스로 지혈하면서 아궁이속의 가마솥 밑부분 숯가루를 숟가락으로 긁어서 상처 부위에 발랐다. 그때 내 가슴에는 분노가 포효했고, 슬픔이 콸콸 흘러내렸다. 엄마가 통곡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던 나는 비장하게 다짐했다. 대통령 할아버지가 엄마를 때려도 내가 가만두지 않고 엄마를 지킬 거라고.
엄마의 얼굴 왼쪽 뺨은 어렸을 때 화상자국이 있었고, 주름이 많이 져 있어서 그런 흉터가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이마까지 다쳐서 평생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엄마의 성형외과 시술을 큰언니에게 얘기했더니, 지금 할머니가 되어 거기 성형수술이 왜 필요하냐고 했다. 엄마의 이마 흉터 수술은 단순히 예뻐지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서 엄마 마음의 상처에 대한 수술이었는데, 큰언니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엄마에게는 비용을 저렴하게 얘기하고 내가 필러 시술을 해드렸다. 그 자리는 약간 희미해졌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미비했는지 한 번하고는 안하겠다고 했다. 엄마의 오랜 작은 소망을 그제야 들어준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시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NO'를 했던 기억이 없다. 2남 4녀 중 다섯째인 나만 유독 왜 그랬는지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어림짐작해 보았다. 유년시절에 엄마를 지키겠다는 그 약속을 무의식적으로 지킨 것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엄마의 사랑을 받기위한 나의 생존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리 네 번째 또 딸로 태어난 나는 존재감 없이 자라면서 알아서 엄마 말에 무조건 순종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는 당연한 마음으로 엄마를 돌본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 아플 때마다 육 남매 중 내가 돌봤다. 엄마를 지키고 싶다는 잠재의식이었는지, 나의 소임이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20대 때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응급실을 오가고, 입·퇴원을 반복할 때, 농사를 지어야하는 엄마 대신에 내가 돌보면서 직장을 휴직하기도 했다.
내가 중년쯤에는 엄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것도 나였고, 자연스럽게 내가 있는 창원의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사교육 일을 하면서도 오전과 휴일에는 거의 엄마를 돌보기 위해 병원에 들리는 나날들이었다. 엄마는 회한을 토해내듯, 나를 없는 듯이 키웠는데, 내가 엄마를 돌본다고 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은 주말에 들리는 정도였다.
지나고 보니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바쁜 2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내 모습을 보시고, 해외여행의 기회를 주시지 않았나 싶다. 그 전후로 해외여행을 한 적은 없다.
예전에는 집안의 힘든 일을 왜 나만 도맡았지? 하는 약간의 의구심도 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부모님을 돌볼 기회가 있었음에 오히려 감사하다. 엄마를 지키고자 했던 나와의 약속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킨 것 같다.
내 생애 가장 오랫동안 지킨 약속인 셈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친정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을 믿는 내가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
사랑과 인정의 목마름은 내 아이들을 키울 때 과보호의 독이 되었다. 아이들의 자립심을 생각하지 않고, 매사 내가 답을 주려고 애썼다. 아! 그것은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대를 이어서 어린 나의 결핍을 채우려했던 것이었음을 혹독한 공부를 통해서 깨달았다.
내 모습을 조금이나마 바라볼 줄 아는 지금은 사랑받으려고 애쓰기보다 배고프고 우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온기를 나눠주려고 한다. ‘사랑은 받느니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나니라.’ 이 시구를 이제야 어렴풋이 가슴으로 이해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