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엄마를 위하는 길이 뭘까?를 생각하며
엄마는 요양병원 입원 후 1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살도 빠지고, 의욕도 잃어갔다. 아무리 물리치료를 해도 뇌경색으로 한 번 마비된 왼쪽 몸은 끝내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시점이 지나니, 그저 기계적으로 응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간병인이 해 주는 대로 의지하고 물리치료사들에게 몸을 맡겼다. 기계에 의해 팔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였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물리치료사들이 지압을 해주었다. 시간이 되면 간병사가 엄마를 부축해서 다시 병실로 데리고 가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엄마는 무표정해 보였고 갈수록 말수도 줄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잃을 때, 삶의 의지도 잃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 바쁠 때가 있다. 나의 업무, 가족들의 식사 준비, 무슨 약속, 운동, 배우는 것 등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해주는 밥을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 힘들 때는 잠시 휴식도 필요하지만, 내가 해야 할 그 무언가가 있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의 소원을 이루고 있는 거다.
입원 1년 반쯤 지났을까? 연화장애가 와서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거의 미음 위주의 식단이었다.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간식을 챙겨주어도 아이들이 젖병을 떼고 이유식을 할 때처럼 엄마도 이유식을 만들어서 갖다 주었다. 외식을 하거나 사 먹을 때 엄마가 먹을 수 있겠다 싶은 것은 거의 사가지고 왔다.
엄마의 삶을 보면서 무엇이 중요한 지 조금은 깨달았다. 적어도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는 먹자는 것. 언젠가는 먹고 싶은 게 없어서 먹지 못할 때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먹는 것도 부실해지고 자의적인 움직임이 거의 없으니 근육은 빠르게 빠져갔다. 가죽만 붙어있다는 게 그런 모습이었다.
어느 날 병원에서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콧줄로 음식을 공급하면서
연명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연명치료를 할 것인지, 포기할 거라면 포기각서를 쓰라고 했다.
형제들은 모두 포기하자고 했다. 콧줄로 연명하는 게 엄마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고뇌하면서 나보다 먼저 그런 상황을 겪은 친구와 의논했다. 그 친구도 엄마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연명치료를 포기하는 게 낫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래도 엄마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엄마와 조금은 더 오래 있고 싶었다.
몇 날며칠을 고뇌하며 기도했다. 엄마를 내 곁에 오래 두고 싶은 건 내 희망이었다. 엄마를 하느님께 맡기기로 하고 연명치료 포기각서에 눈물로 서명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때 연명치료를 포기했던 게 잘한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마음이 아팠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니 콧줄로 연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내드린 게 엄마를 위하는 길이었던 것 같다.
4월 초파일에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엄마였지만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자성사를 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하늘나라를 얘기해 주고 성사를 받자고 하니까 그러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저 내가 원하니까 들어준 것이었는지, 죽음 뒤의 영혼 구원을 바라셨는지는 모르겠다.
성당에 얘기하니까 수녀님께서 오셔서 신부님 대리로 병자성사를 주셨다. 엄마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 나니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세례를 받은 지 3개월 만에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내 꿈에서 실제로 알려 주었다.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