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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들만 챙긴 세월, 병시중은 딸들 몫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2017~2018 요양병원이야기

by 데레사

"너희 오빠, 너희 오빠" 엄마에겐 6명의 자녀 중 장남이 아픈 손가락이었다. 오빠가 60살이 되도록 평생 오빠를 부양하며 살았다. 오빠가 엄마를 봉양한 게 아니라. 엄마에게는 늘 '너희 오빠'인 장남만 있는 것 같았다.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어렸을 때 많은 가정에서 아들은 귀하고 딸은 찬밥신세였다. 1992년도에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이란성쌍둥이인 최수종이가 귀남이, 김희애가 후남이로 등장했다. 딸이 차별받는 내용이었는데, 현실에서 60년대생 이전의 딸들은 후남이가 많았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남, 딸딸딸 또 딸이 나였고, 그다음이 아들이었다. 첫째 딸 아래에 아들이 있었는데 죽었다고 했다. 나는 어렸을 때 나의 존재감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와 위에 언니 이름을 자주 헷갈려했다. 그 당시 집집마다 5~6남매가 있었고 딸 많은 집의 막내딸 이름까지 다 기억하지는 못했다. 내 이름은 평범한 60년대생 여자이름이었지만, 40대가 되어 결국 개명했다. 개명하고 나니 뭔지 모르게 당당해진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오빠에 대해 늘 '너희 오빠'만을 얘기했을 때 그 마음 바닥에는 장남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오빠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아들을 중학교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장남인 아버지가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의 남동생들인 삼촌들은 할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냈는데, 장손은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시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공존했다. 그런 이유로 엄마는 평생 오빠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채무자처럼 살았다.


딸들보다 평생을 '너희 오빠'만 챙겼다. 없는 살림에 딸들은 시대흐름에 따라 최소한의 공부만 시켰고 각자도생 했다. 공부에 열망이 있는 딸들은 스스로 돈을 벌어서 끝까지 공부했다. 정작 엄마가 늙어 병들었을 때는 딸들이 엄마의 병시중을 했다. 다행히 남동생은 결혼 후에 착한 올케가 엄마를 정성으로 대했다.


엄마가 사랑을 쏟은 건 아들인데, 정작 병시중은 딸들에게 받았다. 늘 '너희 오빠'만 생각하는 엄마가 짜증도 났다. 딸들이 엄마에게 용돈을 주면 그 용돈이 중년의 아들을 부양하는데 쓰였고, 아들의 아들, 즉 손자를 돌보는데 쓰였다. 예전에는 그런 엄마를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오빠가 아픈 손가락이니까 거기까지만 이해했다.


나도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중년이 되고 보니, 엄마의 입장, 엄마의 삶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사실 '너희 오빠'만 챙겼던 엄마에게는 별로 잘못이 없다. 엄마세대만 해도 유교사상이 골수에 흐르고 있었고 남아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제도(호주제, 제사, 남녀평등이 아닌 남성 우위사상 등)등으로 아들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호주제도 폐지되었고, 제사도 없애는 추세거나 딸들이 부모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남녀평등사상을 넘어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받는다고 외치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아들 둘 보다 딸 둘이 있는 집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남녀의 기질과 성격의 특성이 있는데, 아무래도 섬세한 여자들이

부모에게 더 살갑게 대하고 잘 챙긴다. 물론 아들도 아들 나름이고, 딸도 딸 나름이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있을 때 그 병원의 이사님 말에 의하면 입원 상담을 받았을 때, 아들보다 딸들이 더 많고, 며느리보다 딸들이 더 많았다고 했다. 병원을 오가며 부모님을 봉양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딸들이라고 했다.

후남이라고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킨 딸들이 정작 자신이 아팠을 때, 돌보는 모습에서 그것 또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았다.


휠체어에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엄마가 병원 산책로에서 목소리도 겨우 나오는 상태에서 한숨 쉬듯 말했다.

"니를 없는드끼 키았는데, 니가 내로 이리하네"

또 넷째 딸이라고 있는 듯 없는 듯 키웠는데, 정작 네가 내 말년을 돌보는구나.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한편에서 쏴하는 설움의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올케에게도 딸들에게는 시집갈 때 한 푼도 못 줬다는 게 내내 가슴 아팠다고 했다. 실제로 몇 푼 안 되는 전답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 둘에게 상속했다. 몇 푼 되지도 않아서 딸들은 눈곱만큼도 전답에 관심이 없었다.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에게 속삭여본다.

"엄마가 딸들에게 잘못한 건 없어요. 그 시대를 탓해야지. 다만 '너희 오빠'를 너무 챙기다 보니

오빠는 오히려 자립성과 사랑을 베푸는 방법을 못 배운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은 딸들은

오히려 자립할 수밖에 없었기에 지금, 각자도생으로 잘 살고 있고, 그런 오빠에게 반찬도 해주고

용돈도 주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손자가 어엿하게 잘 살고 있고, 딸들에게는 오빠에게 줄 능력이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에게 감사해요.


엄마!

평생 오빠를 걱정했기 때문에 오빠는 지금도 여동생들에게 걱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어요. 홀로 먹을 것을 구했던 딸들은 먹을 것 걱정 없이 살고 있구요. 그래서 지금은 감사해요.

하느님 나라에서 이 생의 모든 아픔들을 위로받고 영원한 생명으로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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