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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훈 Jun 04. 2017

02. 독일 미대생 인터뷰

하진란 (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

<독일 미대생 인터뷰를 기획하며>


 짧은 기간을 두고 자주 바뀌는 한국의 입시제도. 특히나 학교 공부와 실기를 병행해야 하는 미술 계열 학생은 매번 달라지는 입시 방향을 쫓아가기 배로 바쁘다. 힘든 입시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바라던 학교, 학과에 입학했다는 성취감도 잠시. 매 학기 버겁기만 한 학비와 재료비는 학생들이 창작활동과 배움에 온전히 시간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예술대학을 통폐합시키는 대학의 방침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인간의 창의성을 다루는 예술 교육을 자본주의적 사고로만 입각해서 바라보는 오늘날의 교육 방침과 정책은 예술가의 삶을 꿈꾸는 학생들의 장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이에 반해 단기간의 성과가 없더라도 꾸준히 지켜봐 주며 창작과 예술 교육의 가치를 높이 여기는 독일.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미술 대학의 교육 덕분에, 독일은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를 꾸준히 배출하고, 나아가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날 독일이 현대 미술계에서 가지는 위상의 원천으로 독일의 미술 대학(Kunsthochschule, Kunstakademie)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교육을 주목하며,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을 만나 독일의 미술대학에서 경험한 입학·교육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 나눈다. 또한, 지속적인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의 미술 대학 입시 및 교육 과정의 전반적인 문제점도 함께 짚어보고자 한다.


연재 인터뷰의 두 번째로 베를린 예술 대학교(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에서 조형 예술(Bildende Kunst)을 전공 중인 하진란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베를린 예술 대학교(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에서 공부 중인 하진란 작가 (사진 제공: 하진란)


이정훈(이하 ,,이’’):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인터뷰 요청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독일의 미술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보고, 듣고, 직접 경험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선, 처음 만나는 독자를 위해 간략하게 현재 재학 중인 학교와 전공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진란(이하 ,,하’’): 반갑습니다. 저는 드레스덴 미술 대학교(Hochschule für Bildende Künste Dresden)에서 공부하다가 베를린 예술 대학교(Universität der Künste)로 편입하여 조형 예술(Bildende Kunst)을 전공 중입니다. 현재 우어줄라 노이게바우어(Ursula Neugebauer) 교수의 지도 아래 공부 중입니다.



이: 동시대 미술의 뜨거운 현장인 베를린에서 조형 예술을 전공 중이신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과정들이 궁금합니다. 우선, 미술을 언제 처음 접하셨나요?


하: 정확히 언제 처음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며 창작하는 일에 항상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미술 대학교에 진학해서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미술을 전공하는 것에 있어서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고, 부모님께서는 제가 흔히 ‘스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류 대학교에 진학해서 ‘-사’ 자 직업인 의사, 변호사, 교사 등의 전문직을 가지거나, 대기업에 취직해서 살아가기를 바라셨어요. 이러한 부모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타협점의 일환으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창작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학과인 생활 디자인 학과에 진학했어요. 돌이켜 보면, 사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던 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잘 몰랐고, 확신이 없었던 점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아요.



이: 지금은 미술 대학에서 조형 예술을 전공하면서 소위 말하는 ‘미술’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그간 미술 공부를 반대하셨던 부모님께서는 이와 관련해서 다른 말씀이 없으셨나요?


하: 지금은 포기를 하신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 결정을 존중해주시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더불어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시려고 많이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항상 감사하죠.(웃음)



이: 앞서 한국에서 생활 디자인을 전공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미술 대학에 소속된 학과인가요?


하: 미술 대학에 속한 학과는 아니에요. 생활과학대학에 속해있고, 인문대와 이공계가 모두 걸쳐져 있는 학과라고 이해하시면 쉬울 것 같아요. 시각/패션/제품 디자인 기본 실기를 바탕으로 많은 이론 수업과 함께 기획/마케팅 프로세스까지 확장해서 다루는 학과예요. 그리고 디자인을 통합적으로 기획하고 다루는 메타 디자인(Meta Design)과 HCI(Human Computer Interaction)를 중점으로 배우는 곳이에요. 쉽게는 디자인 기획 혹은 디자인 이론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 한국에서 생활 디자인을 전공하시고, 현재 독일에서 조형 예술을 공부하고 계십니다. 다른 국가가 아닌 독일의 미술 대학으로 진학하신 이유나 계기가 있나요?


하: 대학교에 다니면서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간 적이 있어요. 당시 미술에 계속 관심이 있었고, 창작하는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순수미술(Fine Arts)로 전공을 바꿔서 교환학생을 갔어요. 영국에서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미술을 공부하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교환학생을 하면서 미술을 공부해야겠다는 확신을 했어요.

 그리고 당시 영국에서 지내면서 친해진 독일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독일에서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욱이 독일 대학교에는 학비가 없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는데, 이 역시 독일로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죠. 그리고 한국에서 혼자 종종 미술 공부를 하곤 했는데, 제가 좋아했던 작업이 주로 독일 작가들 것이었어요. 작업 성향이라는 관점에서 독일과 잘 맞았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 독일 미술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하: 입학 과정은 학교마다 입시 지원 기간이 다르고, 시스템이 달라서 일반화시켜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보통은 마패를 제출하고, 실기시험을 하루에서 이틀 정도 보고, 마지막 날에 인터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드레스덴 학교에 입학할 때는 앞서 말한 것처럼 마패, 실기시험, 인터뷰의 과정을 거쳤는데, 베를린 학교로 편입할 때에는 교수와 직접 연락해서 입학할 수 있었어요. 이 부분에 있어서 독일 미술 대학 진학을 준비하시는 많은 분이 교수와 직접적인 연락을 통해서도 입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제가 알기로는 불가능한 거로 알고 있어요. 옛날에는 교수의 재량이 강해서 가능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요즘은 학교라는 큰 기관 안에 입학을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교수 혼자서 입학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알고 있어요.



이: 입학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나요?


하: 아무래도 독일어가 가장 어려웠죠. 특히, 독일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교수와 인터뷰를 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어요. 하지만 독일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때까지 학교에서 일정 기간을 제공해주고 관대하게 기다려주기 때문에 부담은 조금 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언어보다는 작업을 잘 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저도 독일어를 얼마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인터뷰를 가졌는데, 교수들이 제가 영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는 걸 듣고서는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그리고 입학 이후에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건데, 수업이 주로 토론 형식의 수업이기 때문에 독일어를 할 수 있어야지 같은 반 학생, 교수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수업을 들으면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독일의 미술 대학교에서는 교수의 지도 아래 소수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하: 네. 소수의 인원이 한 교수의 담당 아래 Klasse(반)라는 단위로 묶여요. 교수와 함께 비슷한 성향의 작업을 하는 학생들끼리 모이게 되는데, 비슷한 관심사를 통해서 서로 교류하고, 서로의 작업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이: 학교 수업은 어떻게 구성되어있고, 어떻게 진행되나요?


하: Klasse(반)마다 조금씩 달라요. 저희 반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미팅(meeting)을 하는데, 교수님과 같은 반 학생들이 참여하고, 서로의 작업을 보면서 같이 토론하고, 어떻게 하면 작업이 더욱 발전할 수 있을지,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서로 크리틱(critic)도 주고받아요. 이게 가장 중요한 수업이고요. 미술사, 철학, 미학 등. 이론 수업을 하는 세미나도 있어요. 그리고 작업장(Werkstatt) 수업이 있는데, 작업장 사용 방법에 관한 입문 수업을 들으면, 그 작업장에서 자기가 원하는 작업을 담당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주로 입시 준비를 통해서 미술을 접하고 미대에 진학하는 반면에, 독일에서는 다른 전공을 하다가 미대에 들어오는 사람도 많고, 작업의 기술적인 면보다는 창의성이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학생을 뽑기 때문에, 기술적인 능력은 입학 이후에 학교의 수업 시스템 안에서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것 같아요.



이: 작업을 위한 공간은 어떻게 마련되어있는지 궁금합니다.


하: 학교에서 Klasse(반)마다 작업실을 제공해요. 학교에서 제공한 아틀리에(Atelier)는 같은 반 학생들과 나눠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학생은 언제든지 작업실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늦게까지 작업을 하지 않더라고요. 야간작업(야작)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학생들의 작업 공간이자 수업실인 아틀리에(Atelier) (사진: 이정훈)


이: 작업에 사용하기 위한 재료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하: 일반적인 재료는 베를린에 있는 큰 화방(Boesner, Modular)(각주 1)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요. 특이한 재료는 어디를 가나 구하기 힘든 것 같아요. 그래도 여기는 벼룩시장이나 중고시장이 많이 열려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면 특이한 재료라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이: 학생들에게도 작업을 선보일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지 궁금합니다.


하: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룬트강(Rundgang)을 1년에 한 번씩은 가지기 때문에, 작업을 보여줄 기회가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있어요. 혹은 같은 반 학생들끼리 의견을 모아서, 도시 안의 비어있는 공간을 임대해서 전시하는 때도 있는데, 이 경우에 학교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기도 해요.



이: 룬트강(Rundgang)이 작업을 하는 학생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거나 특수한 기능을 하는 건가요?


하: 작업을 생산하는 과정과 소개하는 과정 둘 다 중요하지만, 소개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소개하는지에 따라서 작업이 많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룬트강(Rundgang)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로 배우는 점이 많은 것 같아요. 단순히 제 작업을 벽에 걸거나, 설치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작업과도 어울리는지를 고려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보여줄 때 작업에 담긴 의도가 잘 드러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하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수업의 연장선 혹은 작가 생활을 미리 경험해 볼 기회인 것 같아요.


룬트강(Rundgang)과 함께 졸업 예정자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베를린 예술 대학교 중앙홀 (사진: 이정훈)


이: 드레스덴과 베를린 두 도시의 학교에서 룬트강(Rundgang)에 참여해보셨는데, 공통점이나 차이점이 있나요?


하: 도시 안에서 룬트강(Rundgang)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수많은 일반인이 찾아오는 점은 드레스덴, 베를린 모두 같지만, 행사 내부를 들여다보면 학교마다 성격이 다른 것 같아요.

 드레스덴에서는 룬트강의 기본적 기능이자 목적인 학교 학생들의 작업을 보여주는 장()이었다면, 베를린에서는 작업뿐만이 아니라 연계 행사와 파티까지 기획하는 큐레이션(Curation)의 성향이 강한 것 같아요. 어느 학교의 룬트강이 특별히 좋다기보다는 각자의 개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 앞서 교수의 지도 아래에서 배움을 받는 학생들이 반(Klasse)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한국의 미술 대학 및 미술계 안에서는 가르침을 받고 계승하는 도제식 교육의 순기능에서 엇나가, 학생과 교수의 사이에서 ‘상-하’ 구조가 형성되어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데요. 독일 미술 대학의 도제식 교육 시스템 안에서의 학생과 교수의 관계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하: 이 점이 한국과 독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독일에서는 학생과 교수의 관계가 굉장히 수평적이에요. 물론, 교수에 대한 존경(respect)은 관계의 배경에 존재하지만, 교수가 어떤 작업을 하라고 해서 그걸 꼭 해야 하는 수직적, 강압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를 교수가 바라지도 않고, 학생이 교수의 말을 무조건 따라서 하지도 않아요.

 이런 점으로 미뤄보면, 독일의 미술 교육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학생과 교수 모두 독립적(independant)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업을 듣는 것, 작업의 주제를 결정하는 것,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등. 모든 선택과 결정 그리고 책임은 자기 몫이에요. 교수는 단지 작업의 진행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식견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지, 어떤 상명하복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죠.

 일례로, 교수가 학생들에게 작업을 언제까지 완성하라고 말하는 경우가 없어요. 모든 게 개인 재량이에요. 앞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반 미팅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데 만약 자기 차례에 보여줄 작업이 없으면 그냥 기회를 잃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점수를 낮게 받는다거나, 어떤 불이익을 받는 것도 없어요. 교수와의 수평적이고 독립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배우고 얻는 게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바보 같은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수평적 관계의 바탕에서 교수가 학생에게 단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라면, 도제식 교육 안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거죠?


하: 도제식 교육 안에서 상하 수직적 성격의 가르침과 배움이 있기보다는, 앞서 학생과 교수가 학교 안에서도 모두 독립적 존재라는 말씀을 드린 것처럼, 독립성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장기적으로 작업 활동을 할 수 있는 훈련을 받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수업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적으로 지원해주는 게 독일의 미술 교육인 것 같고요. 그래서 교수로부터 어떤 특별한 기술을 배우기보다는 나보다 앞서서 미술계 안에서 작가 생활을 하는 한 명의 현역 작가로부터 조언을 받고, 의견을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책이나 실기 연습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작가로서 미술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훈련을 받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이번에는 지난 작업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옆에서 눈을 사로잡은 작업이 있는데, 이전 작업인가요?


하: 네. ‘이방인의 집(Haus der Fremde, 2015)’이라는 제목의 작업인데요. 드레스덴에서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어요. 예전에 제가 장기간 살 수 있는 집을 못 구해서, 두 달에 한 번씩 이사를 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 경험 속에서 집이라는 공간의 개념과 ‘Heimat(본질의 위상(位相))'(각주 2)라는 개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Heimat’라는 개념이 특정한 장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 공간에 대한 개념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게 작업의 시작이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보편적 개념의 집의 형태를 미니멀하게 표현했고, 아래에 바퀴를 달아서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드레스덴에서 실제로 바퀴가 달린 이 집을 가지고 퍼포먼스를 했었어요. 이 집에 들어가서 도시의 한 지점에서부터 전시를 해야 하는 장소까지 이사를 하는 퍼포먼스인데, 집이 태어난(혹은 생산된) 장소에서 전시 장소로 이동되어야 하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이는 물리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장소만이 'Heimat'가 아니라, 어느 곳을 가든, 어떤 환경이든 ‘나’라는 존재가 있는 곳이 내 집과 ‘Heimat’가 될 수 있다는 맥락을 담고 있어요.


이방인의 집(Haus der Fremde, 2015) (사진 제공: 하진란)


이: 퍼포먼스를 통해서 드러나는 작업의 맥락이 아닌 설치 작업 자체가 지닌 의미와 맥락도 궁금합니다.


하: 설치 작업 자체가 지니는 의미와 맥락은 작업물을 구성하는 재료로부터 기인한다고 보실 수 있어요. ‘이방인의 집’ 작업의 집 모양의 구조를 둘러싸고 있는 재료가 건물을 재건축할 때 위에 덮는 망사천인데요. 저는 이 망사천이 기존의 건물이 새로운 건물로 재탄생하는 현상과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는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부여받은 ‘이방인’이라는 정체성과 ‘Heimat’는 무엇이고, 어디인가를 다루는 작업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었어요.

 또한, 건물을 덮고 있는 망사천은 안과 밖이라는 공간을 구분하는 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안과 밖이 보이는 반투명한 특성을 보이고 있어요. 이를 통해서 작업의 거시적 맥락인 나와 타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고민도 함께 담고 있어요.



이: 보여주신 작업이 한편으로는 지속해서 이야기가 오가는 난민(refugee) 혹은 이민(immigration)의 담론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 아무래도 이민, 난민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유럽에 있고,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독일이라는 국가와 공간에서 작업을 보여주다 보니, 그런 관점에서 많이 읽히기도 해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담론을 목적으로 작업을 한 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작업이에요. 그렇지만 차후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가능하고 정치, 사회적 이슈와 결합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고 있어요.



이: 최근 진행 중인 작업을 소개해주시자면?


하: 최근 작업은 일상 사물을 가지고 개인과 집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작업이에요. 평소에 의자나 테이블 같은 사물을 볼 때,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현상을 살펴보기 좋아하는 편인데요. 여행 다니면서 우연히 발견한 의자들을 사진에 담았어요. 보편적으로 의자가 가지는 기능에 적합한 환경이 아닌데, 의자가 이상한 맥락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진을 모은 작업이에요. 이 작업 역시 앞선 작업처럼 ‘이방인’과 ‘Heimat’에 관한 맥락을 품고 있어요.


하진란 작가의 최근 작업 (사진 제공: 하진란)
하진란 작가의 최근 작업 (사진 제공: 하진란)


이: 이방인이라는 주제가 작업에 자주 드러나네요.


하: 나와 바깥 혹은 상대방과의 관계나 어떤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맥락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비슷한 주제와 맥락의 작업을 계속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이: 마지막으로 독일 미술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간략한 조언을 해주시자면?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하: 우선, 학교에만 들어간다 해서 성공을 하거나,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독일에서 공부하기로 했으면, 독일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독일의 법을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의미보다는 한국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지내고 독일인들과 교류를 꺼리고 반한다면, 굳이 독일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그리고 독일에서는 토론 수업이 중요하다 보니, 자기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수업에 참여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자기가 생각하는바, 원하는 바를 사람들 앞에서 명확하게 표현하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무래도 한국 정서상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의견을 다른 나라 언어로 피력하는 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자기가 어떤 것에 대해서 정확한 의견을 지니고 있느냐이지 완벽한 외국어 구사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졸업하기 전까지 작업을 전시에서 프로페셔널하게 보여줄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시키고 싶어요. 그리고 졸업 이후에 험난한 미술계 안에서 작가로 잘 살아남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바쁘신 와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오늘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주>


1. 베를린에서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화방이다.


2. Heimat(독)의 사전적 의미는 고향, 출생지이지만, 작업에서의 드러나는 Heimat의 의미는 고향, 출생지로 설명하기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필자와 인터뷰이는 의견 조율을 통해서 'Heimat'이라는 단어를 '본질의 위상(位相)'으로 해석했다.



*하진란 작가 홈페이지

: http://jinranha.tumblr.com/



추신 1) 인터뷰는 책 출판을 주요 목적으로하며, 브런치와 개인 홈페이지를 기준으로 원문을 발행합니다. 


추신 2) 발행 이후에 부득이하게 인터뷰 내용의 일부분을 수정하게 됐습니다.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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