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고르고 고른 말> (홍인혜, 2021)
여행지나 낯선 곳을 가게 될 때면 그곳에서 파는 엽서를 구경하곤 한다. 내게 있어 엽서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드는 일이다. 이왕 산다면 아무래도 이곳의 특성도 담겨야 하고, 나만의 취향 역시 반영되어야 하니까.
그렇게 고르고 고른 엽서에 편지를 쓰게 될 때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공손해지곤 한다. 혹여 이 엽서에 오탈자라도 남을까, 쓰던 펜이 잘 나오지 않을까, 펜까지 바꿔가며 열심히다.
그렇게 쓴 편지를 친구에게 주면 받는 사람보다 내가 더 뿌듯할 때가 많았다. 아니, 편지를 받는 사람보다 편지를 쓴 본인이 더 감동을 받는 경우는 무슨 경우인 건데..
고백하건대, 나는 상대방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고 혼자 감동하고 혼자 그 내용에 심취하곤 했었다.
누가보면 지독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근데 실은, 내가 쓴 편지는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 때가 많았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을 쓸 때도 있었고, 내가 가고자 하는, 혹은 가고싶은 방향을 편지에 적어 내려간 적도 있다. 편지를 쓰고 나서 그 말들에게 위로받는 건 바로 나였다.
반면 나의 편지는 나를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일기를 꾸준하게 쓰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가끔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틈틈이 무언가들을 기록해둔 일기장이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여과없이 내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는 이곳을, 가끔 시간이 흐르고 다시 열어볼 때면 그때의 감정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른다.
특히 내가 겪었던 슬픔에 관해 어떠한 필터를 거치지 않고 쓴 글들을 볼 때면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당시의 내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언젠가 다시 열어볼 나에게 쏟아내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아파오는 것이다.
이렇게 글의 힘은 세다. 단적으로 아주 개인적인 예시를 들긴 했지만 누구에게나 말이나 글로 위로와 힘, 혹은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일상에서 자신이 들었던 말을 하나 하나 소중하게 담아두었다. 자칫 허공에 떠다니다 사라질 수도 있었을 한 마디들을 소중하게 붙잡아 기록한다.
저자가 직접 듣고 경험한 에피소드들로 묶여진 말 꾸러미들을 하나씩 풀어볼 때마다 이 책을 읽는 나 역시 연신 '아 맞다, 그랬지.' 를 외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귀퉁이를 접어놓았던 많은 부분들 중 몇 가지를, 나 역시 고르고 골라서 내가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살다 보면 별수 없이 긴장되는 순간을 맞게 된다. 마음은 늘 마음 같지 않아서 아무리 애써도 멋대로 요동쳤다 졸아붙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운드 위의 투수가 된다.
나에게 누가 맞서? 내 실력을 믿자.
등 뒤에 사람이 있다. 나의 동료를 믿자.
내일 이기면 된다. 오늘이 그릇되어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다독이는 말) 어제저녁 뭐 먹었어?, 23p
지난 주 친구들과 함께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야기를 하던 중 '팀 정세운' 이라는 말이 나왔다.
팀 정세운라는 말을 듣고난 뒤, 나도 질 수 없어 나라는 팀을 하나 꾸려봤다.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나라는 팀을 구성하는 팀원 중 한 명이 어디가서 지고 오더라도 우리 팀 전체가 망하는 건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가졌더니 회사나 학교, 나를 둘러싼 어떠한 관계에서 내가 실수를 하거나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치명타를 입고 슬픔과 우울함에 흠뻑 빠지는 일이 드물어졌다. (아예 타격을 받지 않는 방법은 없더라,,)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다독이는 말'로 "어제저녁 뭐 먹었어?"를 꼽는다. 사소해보이는 이 스몰토크가 극도의 긴장에 놓인 투수의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다는 거다. 이 부분을 읽고 나도 내 주변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건낼 줄 아는 친구이자 동료,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유도 그러지 않았나. 그럼에도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지 않냐고. 그렇게 내가 지고 돌아오는 날이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조금 더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 같다.
아, 오늘의 출렁임이 나의 운명이었구나, 이 고독은 숙명이었구나. 내가 부족해서, 뭔가를 잘못해서 지금처럼 흘러온 게 아니고 그냥 이렇게 살도록 설계된 것이다.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팔자라는데 별수 있나. 나는 운명에서 탈선하여 힘든 것이 아니었다. 주어진 성격대로 착실히 비틀거리고, 받아든 사주대로 순탄히 넘어지고 있는 거였다.
(위로의 말) 팔자입니다 ,77p
같은 결에서 내게 위로로 닿았던 말 중 하나는 <팔자입니다>였다.
언젠가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차피 우리는 잘 살아갈 텐데,라는 말을 듣고 '아! 나 어차피 잘 살 운명인데 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나는 지금껏 내 자리에서, 아주 빠르진 않지만, 내 생각보다 많은 무언가를 계속 해 내오고 있었다. 가끔은 내가 지금까지 성취해온 결과는 보지 못하고 그 과정 속에서 휘청이는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담이지만 실제로 나는 사주에서 노년운이 상당히 좋다고 했다.(ㅋㅋㅋㅋㅋ)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나의 힘듦들은 모두 나의 노년운을 위한 빌드업 과정인 거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힘들고 넘어지고 있는 건 나중에 빛날 순간을 위해 착실하게 달려가고 있는, 계획된 인생의 한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엠비티아이의 광신론자 중 한 명으로서 j 성향을 가진 나... 이런 계획적인 팔자론에 또 한 번 마음의 안정감을 얻는다.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수많은 이들이 도전하는 판에서, 세상에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은 건 천운이었다. 대체 내가 어떻게 등단한 것인지 징징거릴 때가 아니었다. 스스로 재능이 없다 생각한다면 지면을 반납하고 펜을 꺾어야 했고, 그러고 싶지 않으면 발전해야 했다. 응석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 이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못 쓸 것이다. 나보다 잘 쓸 수는 있겠지만 나와 똑같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시는 수십 년간 쌓아온 나의 고유성이니까. 나의 역사를 통해 나만이 획득한 시선과 벼려온 감각이니까.
(토닥임의 말) 좋아함의 기적, 241p
내겐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구가 항상 존재했다. 그렇게 표현한 것들을 밖으로 드러낼 때마다 필연적으로 따라오던 남들과의 비교는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고 내 이야기들은 그저 숨기고픈 흔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내 이야기에 힘이 있을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하고 지새운 밤들이 내게 남긴 건... 눈 밑으로 축 쳐진 다크써클과 예민함뿐이었다.
모르겠다. 남들에게 그러한 고민의 시간들이 뜻 깊은 시간일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 생각이 많은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에 무언가라도 도전하는 게, 내게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나를 괴롭히는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끝내주는 생각을 떠올렸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는 거다.
재능이라는 말에 더 이상 좌지우지 않으려 한다. 앞서 이야기 했듯 난 끝내주는 노년운을 가진 사람이니까. (내가 이렇게 사주와 운명론에 진심인 사람이다...)
결국 이러한 이야기마저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을 살다보면 한 명쯤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들로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도 결국 너는 나고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이 해묵은 슬픔을 떠올리면 언어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말을 통해 서로의 영혼의 잔상을 엿볼 수 있다.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세상을 당신과 나눌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귀담아 들어줄 수 있다.
(프롤로그-고르고 고른 첫 마디, 7p)
난 이 세상에서 완전한 공감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는 세상과 네가 보는 세상은 다른 세계이니까. 그 세계의 간극을 끊임없이 줄여나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타인의 말을 담을 수 있는 귀와 그들에게 나의 세계를 말해줄 수 있는 입이 있다.
찰나의 마음일지라도, 나는 그것을 믿기로 했다.
(붙드는 말) 불안의 파동이 밀려올 때, 50p
매번 누군가에게 나의 말이 닿아 입가에 미소지음으로 귀결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이 책이 내게 그랬다. 작가의 경험이 나의 경험을 끄집어올렸고, 나는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됐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왜인지 저자를 좋아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자신이 고르고 고른 말을 흔쾌히 건네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