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일단 내 마음부터 안아주세요> (윤대현, 2019)
대학을 다닐 때에는 몰랐지만, 휴학생이 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휴학 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끊임없이 이어지던 남들과의 비교였다.
칩거 생활을 이어지다 보니 (큰맘 먹고 약속을 잡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친구들의 소식을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던 건 휴대폰 속 SNS. 다들 나만 빼고 어찌나 잘 살던지... SNS를 통해 바라본 친구들의 모습은 다들 멋져 보였다. 나와 같이 휴학을 한 친구는 자신이 원하던 회사에 인턴을 하고 있었고, 교환학생으로 타국에서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휴학을 하지 않은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영위해 가고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해냈던 과제들이 있었고, 수십 년 간 단련해온 벼락치기를 보여줄 시험이 있었고, 한 학기의 결과를 보여주는 학점이 있었다. 당시 나의 삶의 기준이자 행복의 기준은 '성취감'이라는 감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가 있어야지만 달성할 수 있었던 이 감정은 딱히 무언가를 도전하지 않으면 결과물조차 나오지 않는 휴학 시절에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존재였다. 쉴 새 없이(?) 달려온 학교생활로 소진된 마음을 충전하고자 했던 휴학이, 되려 나에게 타인들과의 비교와 자기 비하로 방전되고 말았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의 스트레스 근원은 남들의 시선에 있었다. 타인의 시선에 과도한 신경을 쓴다는 것. 기준점이 '내'가 아닌 '남'이 되니까 자꾸 그들과 나를 비교하게 됐다. 남들의 눈에 근사한 사람으로 비추어지고 싶었던 나는, 참 피곤하게도 살아왔다. 운이 좋게도 나를 괴롭혔던 이 피곤함은 남들에게 '성실함'으로 비추어졌고, 나는 남들이 내게 씌워준 성실함이라는 타이틀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처음 성실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칭찬이라 생각되어 마냥 좋았던 것만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단어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를 다그쳤다. 나의 성실함은 곧 완벽을 추구하는 내가 되었고, 나는 언제나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상황이 세팅되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성실하게' 미리 준비한다고 해도, 내가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돌발 상황은 언제나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마음 같지 않던 상황에서 잔뜩 표정이 굳어진 나를 보며 사람들은 말했다.
"너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성실한 사람으로 보이는 줄만 알았는데, 나는 어느새 남들에게 예민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다가 결국 더 큰 스트레스만 얻었다. 과연 나는 행복하게 살아온 게 맞는 걸까, 라는 질문들로 점철되던 나의 지난날.
그동안 내게 삶을 살아옴에 있어서 행복했던 순간들보다 이처럼 남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자기 비하가 주를 이루었다. 이런 과거의 나에게, 책은 우울하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해준다.
보통 행복하다고 하면 느낌을 이야기할 때가 많다. 내 기분이 좋아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한 일이 많으면 기분도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 가치가 아닌 느낌에만 의존해 행복 여부를 판단하면 감정이 목적이 되고 행복활동이 수단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감정이란 놈은 변덕이 심해서, 거기에만 따르면 내 행복지수도 들쑥날쑥해질 수밖에 없다.
(일단 내 마음부터 안아주세요, p198)
실제로 25년간 상담사로서 각종 매체에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들을 들어온 저자는 앞선 나의 케이스와 같이 한 번쯤 생각해보고 고민해봤을 법한 사연들을 소개하며 독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그뿐만 아니라 책 곳곳 삽입되어 있는 '매일 조금씩 나를 더 사랑하는 연습' 페이지는 실생활에서 적용해볼 법한 방법들을 소개한다.
그중 하나로 저자는 하루 10분 멍 때리며 걷기를 추천한다. 사실 이 방법은 실제로도 내가 자주 실천하고, 그 효과를 본 방법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나의 휴학 기간 동안 나는 하나의 회피책으로써 도서관 가기를 택했었다. 집을 나와 도서관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또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엄마는 더 이상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내게 무언가를 묻지 않으셨다. 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서로 마음이 편했던 방법이었던 셈이다.
집 근처 도서관에 가기 위해선 15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그 15분 동안 나는 주로 길가의 나무를 보거나 하늘을 올려다 보기며 걸었다. 말 그대로 '멍 때리며' 걸었다. 책에서 저자는 이 시간이 과거(후회), 미래(염려)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는 시간이라 말한다. 늘 후회하거나, 염려하는 데에 시간을 쏟던 나에게 정말 신기하게도 멍 때리며 걸었던 그 15분이 하루 24시간 중 가장 힐링되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걸까? 아니면 행복해서 열심히 사는 걸까?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란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행복 연구자들은 ‘행복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한다. 행복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생존하려고 했고 그래서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행복을 목표로 생존하고자 노력했다면 힘이 들어 인류는 이미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일단 내 마음부터 안아주세요, p116)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나의 인생 목표는 줄곧 '행복하게 살자'였다. 이처럼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산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사실 인류는 행복해서 열심히 살아왔다고 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 내 마음을 소진시켰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렇지 않으니까,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1년 365일을 펼쳐봤을 때 내가 행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될까?
하루하루에 집착하다 보니,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듯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다. 휴학 후 근 세 달간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으로 무기력했던 이유가 여기에 숨어있었다.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던 하루들이 모여 죄책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걱정하는 마음에서 건네는 부모님의 말조차 모두 나를 옭아매는 듯했으니 말이다.
앞으로는 남들과 비교하며 나를 다그치기보다는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 보려 한다. 20여 년간 지속해온 나의 감정 위주 행복 패턴이 그리 쉽게 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다. 그동안 행복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썼던 나에게, 이 책이 건네고 있는 작은 위로와 방법들은 꽤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