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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Sep 20. 2022

너의 여름은

도서, <장르는 여름밤> (몬구, 2022)


사계절 중, 여름을 네 번째로 좋아한다. 여름은 내가 질색하는 벌레들이 눈에 자주 띄는 계절이기도, 더위를 쉽게 타는 내게 찝찝한 땀자국과 특유의 채취를 남기곤 한다. 그리고 그냥 더우면 좀 참아주겠는데, 불쾌감을 유발하는 고온다습한 장마기간은 나로 하여금 매사에 불평을 쏟아내게 만든다.


그래서 도서 <장르는 여름밤>이 궁금해졌다.  



소나기는 여름의 변주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한순간에 여름의 표정을 바꿔 놓는다. 대기의 흐름이 바뀌면서 다른 방향으로 빛이 번지고, 각각의 빛줄기는 순식간에 색을 바꾼다. (…) 여름의 변주는 놀랍다. 그래서 삶도 여름에 가장 변수가 많은가 보다.

(장르는 여름밤, p.21)


삶도, 여름에 가장 변수가 많다는 그의 문장을 보고 나서야 생각해보게 되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던 나의 삶이 여름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자주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아침에 가방 속 작은 우산을 챙겨 오지 않은 날, 창 밖으로 쏟아지던 오후의 비를 바라보며 매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자칭 타칭 극강의 J 인간으로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대한 일종의 자괴감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삶의 변수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내가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는 마음도 든다. 예상치 못한 순간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변수들은 어쩌면, 내 삶의 변주이기도 하겠다.


생이라는 연주에서 변주 없이 같은 음만 반복된다면 얼마나 심심할까. 내가 그동안 여름보다 다른 계절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런 여름을 지나왔기 때문에 더 좋아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변수들 덕분에 안온한 일상의 소중함을 더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 앞으로는 저자처럼 나의 장르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름을 조금 더 좋아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장르는 여름밤>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이런 것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쓴 교환일기를 돌려보는 듯한 기분. 몬구의 생각이 남긴 기록은 이렇게 나의 경험까지 더해 또 하나의 글이 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자서전 속에 담겨 있는 그만의 감성이 내 삶과 함께 자연스레 녹여진다.  


또 한 번 내 마음속 귀퉁이를 접은 부분은 바로 이 단락이었다.


과학실에서 선생님이 아주 충격적인 말을 했다. 달은 결코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고. 언제나 같은 모양이라고. 우리가 사는 지구처럼. 게다가 우리가 볼 수 있는 달은 한쪽 면뿐이라고 했다. 달의 모양이 달라보이는 이유는 위치에 따라 태양빛이 닿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건데, 신기했다. 달은 변하지 않는구나.

(…) 결코 변하지 않는 둥근 달도 바라보는 이에 따라 모습이 변하듯 나도 다른 모습으로 변하곤 한다. 불변의 고유한 내가 있지만 이런저런 자극과 타인의 시선이나 그때 그때 맡은 역할에 따라서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달과나, p.93)



가려진 달의 모양이 시간에 흐름에 따라 상현, 하현, 그믐, 초승달이라는 이름처럼 바뀌는 것과 달리, 달의 본질, 달의 진짜 모습은 변치 않는다는 이야기.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모를 적에는, 나 역시 가끔 어떤 내 모습이 진짜 '나'인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 당시 나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모습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그 모습들이 모두 별개의 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습들 중 단 하나만이 진짜 '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딸, 친구, 손녀, 조카, 학생, 고객, 연구원, 선생님... 지금껏 내가 나의 인생에서 수행해왔던 다양한 역할들 속에서 나는 모두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인 '나'라는 사람은 언제나 변치 않았다는 사실을.


이를 짚어주는 해당 단락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어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은 다를지 몰라도, 저 너머에 늘 같은 모습으로 매일 밤하늘을 지키고 있는 달이 든든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대답보다 질문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질문은 생각을 자극한다.

(열린질문, p.56)


내게 좋은 책이란, 확실하고 명확한 정보전달의 목적을 가진 책보다는 읽는 이의 생각을 끌어내고 함께 소통하는 힘을 가진 책이다. 이건 내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그 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에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명확한 기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의 경험을 이끌어내는 열린 책과도 같았다.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다가올 내년 여름이 조금 기다려진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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