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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Mar 05. 2024

제 아무리 망치게 될 글일지라도

아무것도 망치고 싶지 않은 날 외는 주문


머릿속에 있던 글감이 키보드를 통해 활자로 표현되는 순간, 어째 내 생각처럼 써지지 않았던 경험이 많다. ‘아, 이게 아닌데...’ 그때마다 한숨만 푹푹 내쉬는 내 자신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새삼스럽게 징그럽다.


내게 떠올랐던 글감이 도안이라면, 글감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행위는 그 도안 위에 색을 덧입히는 작업이 아닐까. 캔버스 위 멋들어진 도안에 붓을 들어 색칠을 하는데... 뭔가 (그것도 아주 많이) 잘못된 것 같다. 수습해 보려 덧칠을 하면 할수록 내가 상상했던 맑은 수채화는 온데간데없고 탁한 빛깔의, 그 와중에 물을 너무 많이 먹어 종이가 울어버린(이럴 땐 종이보다 내가 더 울고 싶다!), 그림만이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최고급 캐비어로 냅다 알탕을 끓여버린 느낌이다. 이럴 바에는 아예 쓰지 않는 게 낫지 않나,라는 자조가 나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망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곧 ‘잘하고 싶다’는 말로도 귀결된다. 정말이지 잘하고 싶어서 매번 괴롭다. 일단 무작정 쓰기라도 하라는데, 첫 만남은 너무 어렵다는 노래 가사처럼 내게는 글의 첫 문장이 그렇게 어렵다.


첫 문장이 나오지 않았으니 다음 문장이 써질 리 없다. 조각난 단어들을 몇 차례 쓰다 지우다를 반복하다가 다시 백스페이스. 이럴 때마다 난 아무 죄 없는 빈 화면을 눈이 시리게 째려보기도, 또 어느 때는 누군가에게 싹싹 빌듯이 두 손을 모은 채 참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보니 글쓰기란 참 수지타산에 맞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 좌절과 분노, 그리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방도가 없어 애꿎은 내 머리만 쥐어뜯느라 빠졌을 머리카락들만 생각해도 이보다 가성비 떨어지는 일이 더 있을까.


이거 쓸 시간에 집 앞 편의점에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했으면 시간당 최저시급은 벌었을 텐데... 아니 적어도 그 시간에 잠이라도 제대로 잤다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이 고통을 사서 괴로워하느냐 말이다. 나는 글쓰기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요, 집은 집중이 안 된다는 핑계로 근처 카페에서 쓴 수백수천 잔의 커피값과 그 와중에 당 떨어진다며 곁들여 주문했던 간식류, 스트레스로 시켜 먹던 매운 떡볶이, 그간 장바구니에만 넣어놨던 목록을 쿨하게 결제했던 날들까지 더하면? 적자도 이런 적자가 없다.


그럼에도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다. 머리만 대충 감고 나온 맹숭맹숭한 맨얼굴을 쓱쓱 세수하듯 쓸어 넘기면서 집 근처 카페로 향한다. 빨간 날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면서도, 쓴다.  



쓰지 않은 글을 쓴 글보다 사랑하기는 쉽다. 쓰지 않은 글은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쓰지 않은 글의 매력이란 숫자에 0을 곱하는 일과 같다. 아무리 큰 숫자를 가져다 대도 셈의 결과는 0 말고는 없다. 뭐든 써야 뭐든 된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중


아무것도 망치고 싶지 않은 날이면 나는 위 구절을 주문처럼 되새긴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0이라서, 내 머릿속에서는 분명 100점짜리였던 글감이 활자가 되어 다시 태어났을 때 고작 1이 되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지언정, 써야 한다고. 기왕이면 0보다는 1이 낫기 때문이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꽃잎을 떼어내며 미래를 점쳐보듯 내 안의 꺼풀을 하나둘 벗겨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마지막 꺼풀은 쓰고 싶다,에서 멈췄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쓴다. 이 글 역시 내 머릿속 글감으로 있었을 때보다 훨씬 망해버린 기분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쓰지 않았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글이라는 것에 의의를 둔다.


이렇게 쓰다 보면 언젠간 나도 100의 출력값을 내는 글을 쓰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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