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
클래식 공연을 본 게 언제였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거진 10여 년이 다 되었다. 그것도 학교 과제로 감상문을 제출하기 위함이었으니 자발적으로 클래식 공연을 관람한 적은 전무했다는 이야기다. 현장에서 듣는 맛이 있다며 악기에 압도되어 써 내려갔던 그날의 감상문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다만 과제 이후, 각양각색의 핑계로 클래식 공연 관람이 내 삶 속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이다.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무게감도 한몫을 했고.
그런 내가 클래식 공연에 다녀왔다. 그것도 부모님과 말이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부모님과 무언가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여기서 '자의'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그건 내가 엄마아빠를 미워하게 될까 봐였다.
내 주변과 인터넷에서는 이런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았다. 열심히 계획한 가족 여행에서 불만만 내비치시는 부모님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던 친구, 마음먹고 모신 식당에서 '물이 제일 맛있다'라고 말하는 부모님에 대한 속상함의 이야기들... 그들의 간증은 이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이들에게 일명 RT를 타면서 내 피드를 점령했고,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기분이 상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의 갈등을 원천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웬만하면 나와 자주 이곳저곳을 다녔던 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래왔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일정이 맞지 않았다. 공연장이 집 근처였던지라 엄마에게 같이 공연을 보러 갈 생각이 있는지 물어봤다. 엄마는 아빠도 함께 가자고 했다. 순간 등에서 땀이 주룩 흘렀다. 오랜만에 세 가족이 함께하게 될 이 시간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라고 공연 전날에는 혼자 다짐까지 했다. 부모님이 공연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더라도 절대로 (부모님 앞에서) 화를 내지 않겠다고. 그렇게 세 가족의 클래식 공연 관람이 시작됐다.
도착한 공연장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들로 꽤 붐볐다.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어린아이부터 나이가 지긋하신 아버님까지. 다들 가족들과 이렇게 공연을 즐기고 있었던 거야?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공연장을, 이제야 부모님과 찾은 것이 머쓱해져 애꿎은 뒤통수만 연신 쓸어 넘겼다.
공연은 피아니스트 송영민의 인사로 시작됐다. 드라마 <밀회>에서의 남자 주인공 선재(유아인 역)의 피아노 대역이자,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배우 박정민과 한지민의 오리지널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그는 관객들에게 익숙할 만한 쇼팽의 멜로디를 직접 연주하며 앞으로 이어진 곡들의 해설을 덧붙였다. 덕분에 막연히 어렵게만 느껴졌던 쇼팽의 멜로디도, 연주를 들으며 이번 공연에서 쇼팽과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두 대상을 연결한 이유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곡마다 다르게 느껴지던 피아노 선율은 나만의 감상 포인트가 되었다. 어떤 곡은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이 마치 짙은 새벽 속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으며, 어떤 곡에서는 함께 연주되는 현악기 모두를 피아노 선율이 포근히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이처럼 피아노와 앙상블을 이룬 현악기(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호흡은 공연장 내부를 단단하게 채우기에 충분했다.
공연에 집중하다 문득 부모님은 어떻게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당일 현장에서 따로 예매한 까닭에 좌석이 떨어져 있던 아빠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엄마는 쳐다볼 수 있었다. 엄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찰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공연이 지루한가?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붙이고 계신 걸까? 1부가 끝나고 화장실로 향하는 엄마를 따라나서며 나는 슬며시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너무 좋더라. 엄마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해. (...) 너도 눈 감고 들어봐. 소리가 훨씬 풍성하게 들리더라.
완벽한 나의 기우(杞憂)였다. 엄마에게 클래식은 지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순간의 단정이 부끄러워졌다. 2부에서는 나도 엄마를 따라 눈을 감아봤다. 귓가를 맴돌던 멜로디가 까만 배경 안에서 이리저리 떠 다니다 이내 하나가 되었다. 특히 2부 곡 중 하나였던 <천공의 성 라퓨타> 중 '너를 태우고'의 묘한 처연함이 기억에 남는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연주자들 간의 호흡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일은 꽤나 가슴 뛰는 일이었다.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면서도 하나의 곡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연주는, 현장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 되었다. 서로 눈을 맞추며 상대의 음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좋았다.
마지막 곡은 공연 시작 전 내게 '지브리가 뭐냐?'라고 물어봤던 아빠에게도 익숙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중 인생의 회전목마'였다. 폴로네이즈식으로 편곡된 이 곡은, 동영상 시청 중 편곡된 해당 곡의 연주가 너무 아름다워 송영민 피아니스트가 사비로 악보를 구입했다는 일화까지 더해져 재미와 감동을 더했다. 공연 후 가진 식사 자리에서 아빠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며 웃음 지으셨던 걸 보니 꽤나 인상 깊게 들으셨던 모양이다.
물론 이번 공연 하나로 내가 클래식에 대한 모든 걸 알 수는 없을 거다. 다만 오늘의 내가 선명히 말할 수 있는 건, 클래식이라는 장르도 남녀노소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공연은 그야말로 클래식 입문자를 위한 공연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겐 클래식과 더불어, 부모님과도 언제든 즐거운 자리를 보낼 수 있다는 걸 느낀 시간이었다. 이처럼 클래식과 부모님, 혹은 본인을 무겁게 짓누르던 무언가가 있었다면 기꺼이 그것을 스스로 행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처음에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과 지레짐작이 만들어낸 무게는 허상인지라, 실제로는 훨씬 가벼울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진즉 해보지 않았던 걸 아쉬워할 수도. 오늘의 나처럼 말이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