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친구, H에게
내가 시간 계산을 잘 못 하는 바람에 강의실에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날,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던 강의실에 혼자 앉아있던 너.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너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네왔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이면 눈으로 너를 먼저 찾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네가 눈에 보이면 안심이 됐거든. 너와 함께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H, 너는 모든 게 빨랐다. 손도 빨랐고 걸음도 빨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약속 시간보다도 항상 일찍 나오던 너였다. 다른 이를 기다리게 하는 게 싫다고. 아마 네 빠름의 근간에는 배려가 곧게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너를 기다리게 하는 쪽은 매번 나였다. 처음엔 그게 미안했는데, 점점 당연해졌다.
너와 나 사이는 기울어진 추와도 같았다. 나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너는 절대로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날 아끼는 만큼 나 역시 너에게 그만한 마음을 주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 자주 심통을 부렸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기다릴 걸 뻔히 알면서 너의 메시지를 일부러 보지 않고 다음 날 답장하곤 했다. -나 어제 자버렸어. 네 답장에 묻어나온 서운함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난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참 이상하지. 서로 사이좋게 동일한 양의 사랑을 주고받으면 참 좋을 텐데. 사랑은 항상 더 많이 받는 쪽이 관계의 우위를 점한 듯 행동하게 된다. 너와 나 사이에서는 내가 그랬다. 어느 날은 내가 말했다. 나에 대해서 아는 척 좀 하지 말라고. 대화의 시작은 분명 날 향한 너의 걱정이었는데,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거였다. 나는 심술이 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네 마음에 못을 박는 걸 택했다.
나와 길을 걸을 때면 넌 항상 팔짱을 껴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좋다고 말했지. 그때마다 난 촌스럽게 왜 이러냐고 툴툴거리곤 했는데, 사실 나도 너와 함께하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런 거였다. 나보다 반 뼘 정도 작은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삼켜야 할 말은 내뱉고 낯간지러운 말은 꿀꺽꿀꺽 잘만 삼키던 때가 있었다.
기억나? 내가 첫 회사에 입사하고 한동안 너에게 힘들다는 소리만 늘어놓던 때. 그때 네가 그 사람들을 나 대신 혼쭐 내주겠다며 화를 내주었을 때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장난치지 말라며 웃고 넘겼지만, 사실 난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을 꼭꼭 씹어 먹었다. 그 말이 꼭, 내 옆에 항상 네가 있어주겠다는 것만 같아서. 나에게 남은 힘이 다 떨어진 것 같은 날이면 네가 쥐어준 그 문장들을 몰래 숨겨놓은 에너지바처럼 꺼내 먹는다는 걸 아마 넌 모를 거다.
나한테 꿈이 뭐냐고 자주 물었지. 그때 나는 내 얘기만 털어놓느라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H, 넌 어때? 있지, 요즘 내 꿈에는 우리가 오래도록 행복하는 것도 포함이다.
이 편지는 내 29년 지기 친구이자 엄마, 혜영에게 보내는 편지다.
우리가 만약 스무 살에 만난 친구 사이였다면 어땠을까? 가끔은, 어쩌면 매 순간, 엄마도 지금의 나와 같은 시절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잊는다. 아마 오늘도 이 글을 쓰고 나면 한동안 또 까맣게 잊어버리겠지.
나의 첫 번째 단짝 친구, 혜영에게. 살아오면서 혜영이 내게 건네준 기억과 나의 얄팍한 상상을 엮어 한 글자씩 써 내려간 편지를 부친다.
*편지의 제목과 형식은 김신지의 책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중 'I에게 보내는 편지'를 차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