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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May 23. 2024

어느 날 카페가 사라졌다

사라진 카페와 새벽 단상

카페가 없어졌다.


이 도시에서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친구가 우리 동네로 놀러 오면 어디를 데려가야 하나,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을 알게 된 후로는 그동안 굽었던 내 어깨가 판판하게 펴지는 기분이었다. 커피 맛을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도 깔끔한 뒷맛을 느끼게 해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 머금을수록 고소했던 아몬드라떼가 있던 곳.

 


무엇보다 이곳은 크로플이 기가 막혔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어찌나 쫀득한지, 위에 얹어진 아이스크림이 녹더라도 단단히 코팅된 겉면을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에서는 반죽의 찰기가 느껴졌다. 그 누구와도 나눠먹고 싶지 않아 카페에 지인을 몇 명 데리고 가든, 항상 명 수에 맞춰 크로플을 시키던 곳.


바나나를 처음 먹는 기영이처럼 크로플을 먹다 주위를 둘러보면 카페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 사장님의 취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선반 위 가지런히 놓인 책들과 벽에 수 놓인 듯한 액자와의 조화, 탁자마다 놓인 작은 조명까지. 이곳은 화장실마저 내 방보다 향기롭고 아늑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러(사실 크로플을 먹으러) 왔는데, 이 공간 안에서 내가 존중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날이 좋은 점심즈음이면 통창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게으름을 부려도 조급해지지 않던 곳.


그런데 이곳이 사라졌다. 부랴부랴 카페에서 운영하던 인스타그램을 확인해 보니 개인사정으로 며칠 전 급하게 문을 닫은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이별은 매번 나를 찾아온다. 앞서 이야기한 카페와의 이별도, 매번 같은 시간의 흐름으로 지나가는 하루와도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새삼 이별의 형태가 이렇게 다양한가 싶기도 하다.


애정했던 나의 카페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 내 곁을 떠나간 인연들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처럼 덩그러니 이별을 마주할 때면 나는 늘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 지었다. 내게 가해자는 떠난 사람이었고, 남겨진 나를 피해자라 자칭했다.


그렇게라도 나는 수많은 이별 속에서 홀로 남겨졌던 나를 위로해야 했다.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나의 지난날을 위로해 줄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나는 나를 필사적으로 껴안았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최은영, <신짜오, 신짜오> 중



나는 내가 늘 부서지는 쪽이라 생각했다. 서로가 공들여 쌓아 올린 모래성에서 나는 너 때문에 부서져 버리는 모래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다. 상실에 빠진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동안 내가 부수어 온 모래알들은 발 밑 아래, 잘게 잊은 채로.


나를 껴안기 위해 내가 무너뜨린 모래성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관계는 우리가 어쩌지 못할 외부의 파도에 휩쓸려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별 앞에서 내가 매번 남겨지는 이가 되었을 리는 없다.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 모순적이게도 내가 기억하기 싫었던 이별들만 여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파도 ASMR을 듣다 커져버린 생각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뜬 눈으로 맞이하는 새벽의 푸른빛은 이리도 위험하다. 사라진 카페가 더 그리워지는 밤이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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