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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Sep 02. 2024

우린 생각이 너무 많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요가 선생님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숨을 옆구리(*해당 부위는 어느 동작을 취하느냐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까지 보내고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라는 말. 요가를 다닌 지도 거진 2년이 다 된 지금, 숨을 어느 부위로 보내라는 선생님의 말은 이제 어느 정도 알겠는데 감각이 느껴지는 곳에 집중하는 일은 아직도 어렵기만 하다.


눈을 감고 선생님이 설명한 자세를 따라 해 보다가도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 너무 아픈데... 지금 내가 바르게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맞나?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걸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실눈을 뜨고) 저 요가복은 어디서 샀을까? 저렇게 팔을 더 뻗은 채로 자세를 해야 하는 건가? (선생님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어어... 선생님 오지 마세요. 힘들어 죽을 거 같은데 선생님이 말씀하신 3분은 언제쯤 끝나려나...'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끊이질 않는다. 호흡에 집중하려다가도 지금 내가 들이 마신 숨이 몸속 혈관을 통해 폐에서 손으로, 다리로 이동하는 상상을 한다. '이걸 동화로 만든다면 제목을 뭐라고 지을까? 제목은 <숨의 여행>이 좋겠다. 그런데 어릴 적에 보았던 동화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던 거 같은데?' 



어려서부터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몸집을 불려 갔다. 생각이 낳은 상상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이 커지기도 했다. 어린 시절 유행했던 빨간 마스크와 같은 괴담은 제 몸집을 키워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나는 내가 했던 무서운 상상에 스스로가 잡아 먹혀 혼자 울음을 자주 터트리던 아이였다.


다들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줄 알았다. 각자의 마음속에서 아우성치는 생각 스위치를 다들 잘 컨트롤하면서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에 '아무 생각도 안 해'라는 대답을 들으면 상대가 나랑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지 않는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어느 대화 자리에서였다. 요즘 고민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상세하게,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나의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나의 답변이 길어질수록 미묘하게 변해가는 상대의 표정과 나의 대답이 끝난 뒤 돌아온 '너는 뭐 그런 생각까지 하고 그러냐'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됐다. 모든 질문에 솔직할 필요는 없겠다는 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는 일명 '마가 뜨는 순간'을 막기 위한 스몰 톡의 기술을 터득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상대의 안부를 묻고, 상대의 물음에는 적당한 길이의 답변을 늘어놓는 방법. 이런 행위들이 반복될수록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남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횟수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반대로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고민하는 시간은 늘었다. 



며칠 전에는 대학시절 친하게 지냈던 언니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 달라진 서로의 근황을 보고하듯이 쏟아냈다. 그동안 자신이 품어왔던 생각과 고민을 서로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어놓았다랄까. 직장과 커리어, 취미, 가족, 연애, 가치관, 사주, 강아지, 그리고 우리 대화의 치트키인 대학시절 추억들까지. 이날 내가 가장 많이 내뱉은 말은 "나도 나도."와 "맞아 맞아."였다.


너무 많은 생각이 낳은 고민을 언니와 나누고 있자니 문득 우린 정말 F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고민은,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다. 백지장처럼 생각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사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구나', '내 고민이 아무 쓸데없는 고민은 아니었구나' 등 서로에게 묘한 위로를 느낀다. 마치 MBTI가 온 세상의 관심사였던 시절, 나와 같은 4개의 알파벳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던 것처럼.


해가 가장 높게 떠 있던 시간에 만난 우리는 해가 자취를 감출 때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이날 우리가 나눈 대화 속에서 해결된 문제는 하나도 없다. 사실 이날 대화에서 서로의 고민이 해결되었을지언정 생각이 많은 우리에게는 금방 다른 곳에서 파생된 생각이 빼꼼 고개를 들었을 것이다.


이날 만남은 혼자서만 생각해 오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음에 따라 서로가 생각했던 고민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흐릿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생각의 지점을 선명히 목격했다. 언니와 헤어지고 난 뒤 내가 홀가분함을 느꼈던 이유는 아마 이 지점 때문이지 않았을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끝나지 않는 생각들과 마주하는 일. 생각들끼리 서로 합의하에 번호표를 붙여서 순차적으로 찾아오면 참 좋을 텐데. 이 녀석들은 내 맘 같지가 않아서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나를 찾아온다. 과연 모든 생각이 해결된 무(無)의 상태가 있기란 할까? 아마 내가 죽기 전까지 미결 상태로 남을 것만 같다.


(...) 오히려 어떤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물음을 치열하게 파고 내려간 글에는 호소력이 있다. 자신도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지만 일단은 힘이 닿는 데까지 궁리해 보겠다는 태도덕이다.

김지원,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의 방식대로 지금 안고 있는 생각들을 계속 고민할 것이다. 그러다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다. 지금 나의 생각에는 명확한 결론이 지어지지 않았더라도 치열하게 생각했던 고민의 시간은 내 안에 남을 테니까.


지금껏 생각이 많아 남들보다 좀 더 피곤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저 말처럼 내 삶의 호소력이 추가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나아진 기분으로 직면한 고민들을 힘이 닿는 데까지 궁리하고 또다시 생각해야지.


나는 자신만의 삶을 힘껏 고민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떠오르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 그 생각에 꼬리를 무는 나만의 물음을 좀 더 견고히 쌓아가려고 한다. 그렇게 나 스스로도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빼곡하게 품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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