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멀리 도는 길이 멋진 여행길이 되니까
몇 년 전,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처음 가봤던 강릉의 안반데기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나는 ’별이 쏟아진다‘라는 말을 그때 처음 느꼈다. 고요하고도 짙은 군청색 하늘 위에 총총히 박혀 있던 수많은 별들은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해 다시 한번 떠났다. 우리는 서로의 황금 같은 주말을 기꺼이 투자하기로 마음먹으며 이른 여름날부터 일정을 맞췄다. 그렇게 우리의 주말 1박 2일 강릉 안반데기 여행이 시작되었다.
차를 타고 안반데기로 올라가는 길. 우리는 안반데기로 올라가는 초입로부터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산을 타고 계속 올라갈수록 안개가 자욱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차 앞에 산신령이 도끼를 흔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지난번에도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안개가 걷힌 틈 사이로 쏟아진 별을 보았기 때문이다. 애써 긍정회로를 돌리며 우리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사람에게는 직감이 있다고 했나, 사실 그날 우리가 걸었던 희망은 미약한 확률에 걸어보는 발버둥과도 같았다. 오늘의 안개의 농도가 지난번보다 훨씬 짙다는 걸 아무도 말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늘은 글렀구나, 별을 못 보겠구나.
도착한 곳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부사를 남발하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라는 말로 불안함을 감춰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더 이상 ’조금‘이 아니게 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일행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내려갈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길. 별을 보러 차까지 렌트하며 숙소에서는 1시간이 넘는, 각자의 집에서는 그보다 더한 시간을 달려온 것이기에 더욱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한 친구는 그래도 높은 곳까지 올라오니 공기의 질이 다른 것 같다는 둥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다시 환기된 분위기 속에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내려가는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차선이 좁은 길이었기에 다시 후진을 해야 하는 상황. 어? 분명 후진이 되어야 하는데… 후진하기 위해 운전석에 앉아있던 친구가 몇 번이나 페달을 밟았지만 미동 하나 없었다. 차 안에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운전자를 제외한 모두가 내려서 차를 밀어 보기도 했으나, 걸리지 않던 후진이 기적처럼 작동되는 일은 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차였기에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렌터카 상담 직원과 몇 차례 전화 끝에 내려진 결론은 견인차를 불러야 된다는 것이었다. 견인이라는 두 글자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한쪽 볼을 꼬집어 봤다. 꼬집은 볼이 얼얼했다. 꿈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와중에 누가 ‘혹시 여기서 견인 경험자 있어?’라고 물어봤다. 그 질문에 눈이 마주친 우리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없었다.
상담 직원은 견인차가 도착하면 가장 가까운 렌트 업체에서 새로운 차를 빌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겠다고 했다. 다만 현재 우리 위치가 산속이기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당시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견인차를 기다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을 가늠해 봤다. 아마 하루가 훌쩍 지나가게 될 것이었다. 실소가 터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1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흐르자 견인차량이 우리가 있는 산속에 도착했다. 난생처음 견인차를 타고 하산하는 길. 차를 견인해 주신 기사분은 일교차가 큰 요즘 같은 날씨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별 보기 쉽지 않다는 말과 생각보다 이런 곳으로 견인 출동이 잦다고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
약 다섯 시간 만에 내려온 강릉 시내의 하늘은 안반데기와 달리 구름이 제법 지워진 모습이었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웠다. 바뀐 렌트차는 이전 차량보다 훨씬 좋았다. 이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우리는 숙소 근처에 위치한 해변으로 핸들을 돌렸다.
안반데기에서 깔려고 샀던 은박돗자리가 근처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펼쳐졌다. 옹기종기 돗자리 위에 몸을 뉘었다. 우리의 눈앞에는 안반데기에서는 보지 못했던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한 하늘, 그 위에 수 놓인 별들이 반짝였다. 나도 모르게 우와라는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아마 안반데기에서 계획대로 무탈하게 별을 보았다면 차를 타고 지나쳤을 풍경이었을 것이다.
짧은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어폰 사이로 ‘때로는 멀리 도는 길이 멋진 여행길이 되기도 하니까’*라는 가사가 흘러나온다. 멀리 돌아왔지만 그만큼 더 반짝인 별들과 마주한 여행. 우리는 평생의 안줏거리 하나와 잊지 못할 밤하늘을 가슴에 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날 찍은 별을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핸드폰을 켜면 언제나 그때의 별이 나를 반겨준다. 같이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과 배경사진에도 그때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다. 아마 이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싶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나버린 일을 후회하다가 놓쳐버렸을 풍경이 얼마나 많을까. 역시 후회는 짧을수록 좋다. 만약 그때 우리가 안반데기에서 별을 보지 못했다는 슬픔에만 빠져서 숙소로 돌아갔다면? 이 풍경은 영영 보지 못했을 거다.
사진첩 속 그날의 밤하늘을 꺼내어 다시 한번 별들을 찬찬히 세어본다. 인생에서 마주할 수많은 갈림길 위에서, 내가 가지 않은 길을 바라보며 후회로 속상해할 때도 있을 거고 아쉬움에 눈물을 잔뜩 머금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 풍경을 꼭 기억해야지. 영원히 지지 않을 사진 속 이 별들이 내게 멋진 이정표가 되어 줄 테니까.
*Red Velvet, <Wings> 중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