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사랑을 그린 화가들> (이창용, 2024)
사랑은 무엇일까? 얼마 전 친구들과 나눈 대화에서 한 친구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사랑이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나답지 않게 만드는 거'라는 말. 친구의 그 말은 형태가 없어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사랑의 복잡다단한 성질을 간단히 함축해 주었고, 그 속에서 변화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해 주었다.
<사랑을 그린 화가들>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사랑을 탐구하였던 화가들의 작품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려왔다'는 뭉크의 말처럼, 화가 본인이 느낀 사랑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바라보며 독자는 자연스레 화자가 들려주는 이들의 인생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에곤 실레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상을 지각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새롭게 해부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대상의 내면에 담긴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 심지어 이중 초상이나 삼중 초상을 통해 이미지와 자아를 해체한 뒤, 무의식을 바탕으로 한 확고하고 새로운 자아가 우리 내면에 있다는 개념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장면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실제 세계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죠.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때때로 불편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분출하다 - 에곤 실레, p.162~163)
에곤 실레는 대상을 단순히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면의 욕망과 본능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처럼 사랑은 내 안의 나를 새롭게 해부하고 조립한다. 에곤 실레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듯, 사랑 역시 우리 내면에 숨겨진 욕망과 감정을 끄집어낸다.
오늘날 예술에서도 이와 같은 접근은 여전히 중요하다. 작품에는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 대한 예술가의 깊은 고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책 속의 7인의 화가들의 작품은 감정의 표출을 넘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내면을 헤아려보게 하는 중요한 창을 제공한다.
특히 나의 경우, 이중섭의 이야기에 마음이 동화되었는데 어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기억에 남는다.
돌도 지나지 않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해 이름도 친구도 없는 어린 아들, 그런 아들이 홀로 땅속에 묻혀 저승에서도 외로울까 걱정했던 아버지 이중섭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들의 친구를 그려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들의 모습을 투영하여 벌거벗은 사내아이들이 무리 지어 등장하며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그림들은 훗날 이중섭 화가의 작품 세계에 또 다른 중요한 주제가 되었는데요. 바로 군동화의 탄생이었습니다.
(전쟁의 포화를 가로지른 사랑과 그리움 - 이중섭, p.247)
이중섭의 <도원>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평화로운 무릉도원 속 아이들의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중섭의 생애를 인식하는 순간, 작품 <도원>은 더 이상 밝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림으로, 죽은 아들의 친구를 그리며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의 감정을 담아 붓질하였을 아버지 이중섭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 다시 말해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예술과와 감상자 사이의 소통'이 존재하는 것이 예술작품이며, 그 안에서 교감을 이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술적 희열을 경험하곤 합니다.
(프롤로그, p.7)
사랑의 형태와 깊이는 너무도 다양해서, 내가 감히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책 속에 담긴 7인의 이야기는 모두 다른 모습의 사랑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품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그들의 입장에서 작품을 바라보려 노력하게 된다. 작품 이면에 숨겨진 내면의 감정과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에 대해 골똘히 탐구해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 앞에서 '내가 나답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고 탐구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힘을 키워보는 일.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기꺼이 본인이 매개체가 되어 우리에게 예술가의 감정을 보다 선명하게 전달해 준다.
세대와 성별, 집단을 나눠 나와 다른 이들은 모두 경계하고 조롱하기 바쁜 사회다. 혐오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에게는 예술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하고 그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랑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도구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 책을 통해 미술을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결 짓는 경험은 물론,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