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세르주 블로크 展>
이번 <세르주 블로크展>은 그가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한 일러스트레이션은 물론, 조형물, 회화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전시라기보다, 그의 작업 세계 전반을 보여주는 총체적 집합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전쟁의 참상을 풍자한 <적>, 기다림과 사랑, 성장 등 인생에서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풀어낸 <나는 기다립니다...>, 예술가의 여정을 그린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까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세르주 블로크는 가벼운 농담처럼 풀어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곱씹을수록 날카로운 통찰이 숨어 있다. 그가 작품 안에 녹여낸 길고 가느다란 선, 그 끝에는 예상치 못한 깨달음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처럼 세르주 블로크는 단순한 평면을 넘어서 '선'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작품 안으로 끌고 온다. 그가 풀어내는 작품 속 ‘선’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내 손에도 가느다란 선 하나가 쥐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중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이다.
제목 그대로, 어느 날 소년이 길에서 '보잘 것없는 작은 선'을 주우면서 시작된다. 이후 소년의 일생을 걸쳐 선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은 소년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와 마음이 달라 다투기도 한다. 가만히 해당 영상이 흘러나오는 스크린에 집중하다 보면, 소년의 여정이 이번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작은 선의 위대한 여행’을 꼭 닮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소년처럼 내게도 꼭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처음엔 작았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길어질 때, 그 마음을 품었던 나조차 감당이 되지 않는 순간들. 그 마음에 걸려 자주 넘어지기도 했고, 나를 칭칭 감싸는 이 마음이 나를 결박하는 것 같아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위를 가져와 나를 옭아매는 이 마음을 당장이라도 끊어버리고 싶어질 때도 부지기수였다.
그중 어떤 마음들은 미련 없이 끊어버렸고, 어느 마음은 끊어내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매달고 있는 마음은 왜 이렇게 많고 긴 걸까?'라는 물음에 답을 내리지 못해 괴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를 본 뒤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랄까. 내가 끊어내지 못한 마음, 그 마음의 선들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고, 앞으로도 나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이제는 노인이 된 소년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의 일부분을 잘라 길 위에 두고, 그것을 과거의 소년이 그랬듯 또 다른 소년이 그 선을 줍게 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처럼 세르주 블로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앞으로 나와 함께할 선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 저와 매일 함께 살아온 선을 준 인생에 감사하고자 이 책을 지었습니다. 오랜 동반자인 선과 저는 때때로(자주) 다투기도 했지요.
선은 저를 살게 했고, 모든 관점에서 스스로를 성장하게 했으며, 공유하고, 제 자신과 타인을 즐겁게 해 줍니다.
'선'이라는 흔하고 단순한 주제를 어떻게 작품 속에 녹여냈을까라는 단순한 궁금증에서 첫 발을 들였던 세르주 블로크 전은, 전시장을 나서면서 이 전시의 부제였던 '작은 선의 위대한 여행'에 대해 곰곰이 곱씹게 만든다. 작은 선의 위대한 여행. 꼭 저마다 품고 있던 가슴속 작은 선을 꺼내어 보라는 것만 같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그은 선이 곧 당신의 위대한 여행의 첫걸음이 될 거라는 나직한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