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say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마음

살아오면서 내게 쓰지 않을 이유가 이토록 많았음에도

by 모래


아주 잠깐 방송작가로 일한 적이 있다. 중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었느니, 실제로는 십 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작가라는 이름을 달게 된 셈이다. 그렇게 바라온 순간이었건만, 나는 첫 프로그램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더는 작가 경력을 쌓지 않았다. 두려웠다. 이제 와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도망쳤다.


방송국 출입증을 목에 걸고 느낌 좋은 카페에서 고상하게 글을 쓰는 커리어우먼을 꿈꿨다. 물론 이 환상은 금방 깨졌고, 막내로서 온갖 잡무를 처리하면서 별로 죄송하지는 않지만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죄송한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됐다. 어디서든 꺼내야 하는 고철 노트북을 이고 지고 다니다 보니 딱딱하게 굳은 승모근은 덤이었다.


그러다 선배로부터 이번 꼭지는 네가 한번 써보라는 말을 들었다. 분명 기회였는데 이상하게 짜증부터 났다. 피곤해 죽겠는데 언제 쓰냐는 생각뿐이었다. 그렇다고 안 써갈 순 없기에 반쯤 감긴 눈을 부여잡으며 썼다. 억지로 쓴 글은 역시 티가 났다. 이건 내가 봐도 영 아니다 싶은 대본이었다.


나조차도 두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글과 마주할 때면 자괴감이 들었다. 글쓰기가 내게 소중했던 만큼 내가 쓴 글이 성에 차지 않을 때면 미치도록 괴로웠다. 그 당시 글과 나는 한 몸이었다. 남들의 피드백도 나를 향한 날 선 공격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멍든 과일처럼 자주 짓물렀다.


게다가 나보다 먼저 이 일을 시작한 동료들을 볼 때마다 괴로웠다. 앞선 경력이 있는 그들이 나보다 일을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그들에겐 이 일이 천직처럼 잘 어울려 보였다. 반면 나는 어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가슴이 답답했다.



그럴수록 이상하게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써 내려간 결과가 나의 최선이었다고 말해버리면, 그게 곧 나의 한계로 규정될까 봐 두려웠다. 평생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쓰는 게 죽도록 싫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는 예술가들의 고백을 훔쳐볼 때면... 부러웠다. 돌이켜보면 나는 대개 내가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지 못해서 글을 썼다. 그렇게 마감을 향해 울면서 달려가던 날들. 나에겐 쓰고 싶지 않은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글쓰기는 내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


누군가의 반짝이는 글을 읽기라도 하면 금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포기한 글을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있다고? 활자 너머 얼굴도 모르는 이가 미치도록 부러워서 분했다. 가끔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사치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있었는데, 내가 남은 한평생을 글만 쓴다고 해도 절대로 쓰지 못할 것만 같은 문장을 볼 때 그랬다.


'역시 나한테 재능 같은 건 없었나 보다.' 속으로 수없이 이 말을 되뇌었지만 입 밖으로는 절대 내뱉지 않았다. 혹시나 있었을지도 모를 코딱지만 한 재능마저 도망갈까 봐. 그래도 이럴 때마다 하는 재능 타령은 약해진 마음을 어딘가 기대고 싶을 때 특효약이었다. 내가 부족한 건 타고나지 못한 탓이라며 변명할 수 있었으니까. 갈수록 재능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도 안다. 사실 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되게 잘 쓰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거다. 그래서 매일 남과 비교하고, 심지어는 도망까지 쳤으면서 다시 글을 쓴다. 한 서른쯤 되면 익숙해지려나 싶었는데 서른이 된 지금도 똑같이 힘들고 괴롭다. 이제는 마감 앞에서 밤을 새울 체력도 없다.


이번에는 왜 해보겠다고 했을까. 달력 위 마감일을 표시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차라리 그 시간에 마음 편히 놀기라도 하지, 오른손으로 쇼츠를 넘기면서도 마감 생각에 불편해하면서 딴짓을 한다. 마감을 미뤄달라고 읍소라도 해 볼까? 그러기엔 체면이 서지 않아 그 말은 마음 깊은 곳에 슬며시 묻어두기로 한다. 그렇게 며칠을 더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노트북을 연다.


글쓰기가 싫어서 도망쳤던 내가 어느새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새하얀 메모장 앞에서 나는 그 시절처럼 머리를 쥐어뜯는다. 살아오면서 내게 쓰지 않을 이유가 이토록 많았음에도 쓴다. 언제 또 도망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뭐라도 써본다.


어쩌면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마음이 사랑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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