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본질을 깨달은, 일흔둘 엄마와의 이탈리아 여행

by 킨스데이

작년 한 해를 돌아보면 유독 또렷이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일흔둘 인 엄마와 단둘이 떠난 7박 9일 이탈리아 여행입니다. 패키지여행이었고, 해외여행 경험이 적은 엄마도 아니었지만 ‘엄마와 단둘이’라는 조건은 생각보다 큰 결심을 요구했습니다. 엄마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할 수 없자, 상대적으로 시간이 유연한 프리랜서였던 제가 당첨이 되었지요. 엄마와의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다고 해도, 자기주장이 분명한 엄마를 모시는 여행이라니. 이번 여행의 제 미션은 분명했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최대한 엄마와의 추억을 만드는 것.


엄마는 어릴 적 한국무용을 배울 만큼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고등학생 때 집안 사정이 기울며 인생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간호사의 길을 택했고, 중학교 교사로 갓 사회에 발을 디딘 아빠와 결혼했습니다. 나이트 근무가 싫어 병원을 그만둔 뒤에는 딸 셋을 키우며 빠듯한 살림을 꾸리는 데 온 에너지를 쏟으셨습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듯 검소하게 살았고,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에야 간호 학원 강사로 다시 사회에 나가셨어요. 지금의 엄마는 교회 권사님들과 어울리고, 한국무용과 장구를 배우며 명랑한 노년을 보내고 계신데요.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까지 해외여행도 제법 다녀본 ‘여행 선배’인 셈이셨습니다. 이번 패키지에 모녀 참가자는 세 쌍이나 있었고, 엄마는 세 번째로 연장자였지만 체력은 누구보다 쌩쌩했습니다.

문제는 시차 적응차이였습니다. 엄마는 코를 골며 깊이 잠들었다가 새벽이면 가이드의 “가만히 누워 계세요”라는 말을 무시한 채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방 안에서 체조를 하며 부스럭거렸습니다. 잠귀가 극도로 예민한 나는 그날부터 여행 내내 수면 부족 상태로 버텨야 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고비는 엄마의 토종 입맛이었습니다. “난 안 먹어.” 입을 꾹 다물고 단호하게 말하는 엄마 앞에서 새로운 디저트도, 자유식 메뉴 선정도 자연히 제약이 생겼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주문하면 꼭 절반을 드시면서 말이죠. 그럴 거면 차라리 “네가 시키면 난 맛은 볼게”라고 말했으면 제 마음이 좀 더 가볍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젤라토, 아포가토, 에스프레소, 이탈리아식 크루아상과 샌드위치, 피자까지는 성공했고, 핸드메이드 버거도 의외로 잘 드셨어요. 시오르미네 호수 뷰를 보며 해산물을 먹지 못했고, 아말피에서 맥주 한 잔에 해산물 튀김 요리를 맛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지만요. 엄마는 주식으로 나온 파스타에는 끝내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이를 지켜보는 가이드에게 괜히 미안해졌습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 이번에 뼈저리게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델인 된 치비타 데 반뇨레조 (사진 제공: 킨스데이)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도 좋았지만 산지미냐노, 치비타 디 반뇨레조, 아말피 같은 소도시는 특히 인상 깊었는데요. 이탈리아는 다시 오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관광객도 많고 소매치기도 많았지만,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며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장수 국가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엄마와 싸우지 않고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입니다. 혼자가 아니어서 덜 외로웠고 보폭이 비슷해서 자유시간에 구경 다니는 것도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만약 다시 함께 여행을 간다면 비용을 더 지불하더라도 각방을 쓰는 게 서로의 만족도를 높여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덜 예민해지고, 엄마도 제 눈치를 덜 보실 테니까요. 사실 저는 딸 셋 중 둘째라 어릴 때부터 알아서 눈치 보고, 혼자 해결하는 타입이었습니다. 말대꾸 대신 방으로 들어가 버티는 쪽이었고 그래서 부모님과 큰 갈등 없이 자란 편이지요. 부모님도 저를 그냥 내버려 두셨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이번 여행에서 ‘엄마와 추억을 많이 쌓아야지’라는 생각마저 어쩌면 제 욕심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여행은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가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저보다는 친구 권사님들과 신나게 다니는 여행이 더 잘 어울릴 겁니다. 저는 그저 엄마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과 취향을 존중하면서 조용히 뒤에서 지원하는 딸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꽤 괜찮은 효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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