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km. 친정으로 가는 거리. 멀다. 나는 언제 그곳에서 이토록 먼 곳으로 온 걸까? 카시트에 두 아이를 태우고 차를 몰고 남쪽으로 향한다. 친정이 먼 만큼 점점 가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결혼 전에도 언니와 둘이 서울에 살며 직장생활을 했다. 그때 내가 사는 상수동의 다가구 주택 한켠이 우리집이 아니라 창원의 엄마와 아빠가 사는 그곳이 우리집이라 여겼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며 그곳은 ‘친정’이 되었고, 9년 동안 다섯 번의 이사를 하며 기러기처럼 살고 있지만 내가 만든 가족을, 사는 곳을 우리집이라고 불렀다. 특히 5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친정은 더 멀게 느껴졌다. 거리가 아닌 마음의 거리. 아빠와는 좀처럼 가까울 수 없는 관계였다. 340km의 먼 곳으로 떠난 곳도 어쩌면 아빠와 멀어지기 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술을 마시는 아빠가, 다혈질인 아빠가, 엄마를 고생시킨 아빠가 아니 세상에서 내가 가지지 못한 수많은 것들의 이유가 아빠 때문이라 여겼다. 부모가 되어보니 좋은 부모가 되는게 쉽지 않음을 뼈져리게 느끼지만, 어린시절의 나는 가차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신이 갈 수 없어 부모를 주셨다더니, 순 거짓말이네 하며 무신론자가 되었다. 신의 존재를 믿을 만큼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빠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명절때도 설날에만 친정에 간다. 5년 전, 설날에 서울의 시가에서 창원의 친정까지 11시간 30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때 양가에 선언했었다. 설날은 오로지 친정에서, 추석은 오로지 시가에서 보내겠다고. 아빠의 생신이나 어버이 날, 갈 때도 있고,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용돈과 카네이션을 보낼 뿐이었다. 아빠도 서운한 내색없이 없으셨다. 하지만 엄마의 기일에는 무조건 간다. 올해는 음력으로 11월 4일 목요일이었다. 수요일 오후 두 아이를 데리고 갔다. 남편은 출장으로 갈 수 없어 나 혼자 먼 거리를 운전해야 했다. 사람들은 산 사람이 중요하지, 죽은 사람이 중요하냐고 하지만 내게는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 날이 중요했다. 그때의 나는 서른 둘이었고, 엄마는 쉰 여덟이셨다.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에 엄마는 죽음을 맞았다. 사람들은 아이 셋 다 키웠으니, 살 만큼 살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요즘 백세시대인데, 여자 평균 수명이 80세가 넘는데 그게 살 만큼 살았냐고 소리쳤다. 그 이후 쉰 여덟 살 이후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 대해 묘하게 애도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이 사실을 언니에게 말했을 때 매정하다 했지만, 서른 둘에 쉰 여덟 엄마를 잃은 나의 소심한 복수였다. 나에게도 여전히 엄마가 필요했다.
엄마의 기일은 늘 찬란한 가을이었다. 퇴직한 아빠와 미혼인 언니와 남동생, 나는 나란히 앉아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을 했다. 간소하게 차렸다. 때로는 지나치게 엉뚱한 음식이 올라가기도 했다. 올해는 꽃게수육이었다. 떡 대신 롤케이크를 사서 올렸다. 그래도 엄마가 좋아했던 나물이나 조기, 탕국은 빠짐이 없다. 그 외에는 우리들의 식성을 반영한 음식들이다. 결국 먹는 건 우리니깐. 문을 열어두고 제사를 지낸다. 절을 올릴 때면 항상 묻는다. ‘엄마, 거기 왔어? 엄마, 거기 있어? 엄마, 잘 지내?’ 대답은 없다. 일년에 몇 번쯤은 찾아오길 바랄 때도 있고, 매정하게 모든 걸 잊은 채 영면하길 바라는 마음이 교차할 때도 있다. 제사 다음 날은 친정에서 100km 떨어진 가족 납골묘로 간다. 그곳엔 여든 아홉, 엄마와 같은 해 봄 돌아가신 할머니와 내가 모르는 조상들의 유골함이 있다. 엄마의 유골함이 가족 납골묘로 들어가던 날, 장례식의 마지막 날 언니와 나는 울었다. 자신의 부모에게 돌아가는 것도 아닌 시가 가족들의 납골묘에 함께 있어야 하는 엄마가 불쌍해서, 제발 혼 같은 건 없었으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길 간절히 바랐었다. 물론 가족 납골묘는 엄마, 아빠의 고향이 있는 곳으로 아빠의 주말 농장이 있기도 했다. 아빠는 매주 두 번은 주말 농장을 가꾸기 위해 100km 떨어진 곳을 갔다. 일주일에 400km를 달린 것이다. 누구보다 자주 그 납골묘를 찾아 풀을 베고, 꽃을 심었다. 생일에는 케이크를, 햇과일이 나왔을 때는 햇과일을 들고 혼자 소풍가듯 찾았다. 아빠는 그 순간 외로웠을까, 생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올해도 엄마의 가족 납골묘에 갔다가 아빠의 주말 농장에 갔다. 500평 남짓한 그곳은 발 비딜 틈 없이 작물들로 가득했다. 고구마와 구기자, 배추와 무, 감나무와 사과나무 등 수십종의 작물들이 엉기어 어수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빠는 그저 심고 싶은 대로 심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농장의 컨테이너에서 컵라면을 먹고, 대나무로 감을 따고, 배추에 물을 주고, 구기자 열매를 땄다. 메뚜기도 잡고, 감자를 캐고, 파를 마구잡이로 밟기도 했다. 오후 늦게 친정으로 돌아가 바깥으로 나가 소고기와 맥주를 마시며 마지막 날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아빠는 분주했다. 우리 차에는 엄청난 작물이 실렸다. 햇쌉 20kg 한 포대, 고구마 한 포대, 단감과 대봉감 두 박스, 그 외에 제사상에 올라갔던 배와 귤, 바나나와 캔디, 명절에 들어온 햄 세트와 기름 세트, 반찬통 세트도 실렸다. 세 밤을 자고 다시 340km를 달려야 할 우리의 차는 무거워졌다. 집으로 돌아와 정리를 했다. 그래, 이번주는 삼일 동안 무지출로 살며 아빠가 키운 작물들로 먹고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아빠가 키운 것들 것 버릴 만큼 가차없진 않았다.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전날 남편을 인천공항으로 배웅하고, 언니네 가서 먹은 코다리찜이 있었다. 다른 반찬은 꺼내지 않고 보리차와 코다리찜을 먹었다. 저녁은 기름에 파를 넣어 파기름을 만들고 아빠의 신김치, 아니 쉰김치에 가까운 김치와 계란을 넣은 김치볶음밥을 해먹었다. 그건 작년 겨울 아빠가 김장한 김치였다. 아이들은 계란후라이와 동치미로 간소한 저녁을 차려줬다. 간식으로는 배와 감이다. 나는 감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감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화요일은 무기력했다. 아빠의 작물을 먹는 72시간이 아니라 무지출이니깐 정성스럽게 요리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느냐라는 마음이었다. 두 아이를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먹은 늦은 점심은 다시마가 두 개 들어가고 면발이 오동통한 라면이었다. 아빠의 김치와 함께 먹었다. 저녁은 냉동실에서 꺼낸 고기로 육전을 만들었다. 마늘과 버섯, 새우를 넣고 알리오올리오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고기를 살 때 받았던 10일쯤 된 파채와 숨이 거의 죽어가는 부추를 넣고 쭈꾸미 볶음을 만들었다. 맥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요리를 했다. 저녁은 역시나 감과 배다.
수요일 아침으로는 감을 깎아 먹었다. 냉동실의 곰탕을 데워 깍두기와 함께 먹으니 꿀맛이었다. 저녁은 냉동 피자였다. 곧 장기 해외 출장을 떠나는 남편에게 마지막 저녁식사로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었을 때 ‘피자’라고 대답했다. 피자는 해외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거 아니냐고 어이없어 했지만, 회사에서 삼시 세끼 한식을 먹기 때문에 오히려 피자가 먹고 싶다 했다. 맛있게 먹을 만큼 한 판만 시키면 될 걸, 한 판과 두 판의 가격이 만원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결국 무리해서 두 판을 시켰고, 그 중 한 판은 냉동실로 직행했다. 밥 말고 빵 같은 걸로 저녁이 먹고 싶다던 아이의 요청에 냉동실을 뒤져 들어간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잊혀진 피자를 극적으로 구해서 먹었다. 전자레인지를 돌린 피자는 만원이라면 절대 사먹지 않을 만큼의 맛이었다. 간식으로는 홍시를 먹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단단하고 떫은 감이었는데 5일만에 달달하고 부드러운 홍시로 변신했다.
무지출을 하는 것은 어렵진 않았다. 지금 당장 써야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기력함이 나를 덮칠 때면 배달을 시키고 싶어 손이 간질거렸다. 또한, 두 번 정도 편의점에 택배를 보내러 갔을 때 아이가 과자를 집었다. “엄마가 3일동안은 돈을 0원 쓰기로 했거든. 그래서 과자를 사줄 수 없어. 집에도 과자와 젤리, 사탕이 있으니 집에 가서 먹자.”라고 설명해줬다.
그 이후 목요일과 금요일도 나는 무지출 행진을 이어갔다. 목요일은 날짜가 하루 지난 4인분의 유부초밥을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만들어 먹었다. 유통기한은 말 그대로 유통이 가능한 기간이니깐, 하루 쯤은 괜찮았다. 아빠가 준 깡통 햄을 넣어 만들었더니 정말 맛있었다. 혼자서 유부초밥 2인분쯤은 문제없을 정도다.
금요일도 아침도 아이와 함께 곰탕과 계란후라이, 김치로 가볍게 먹었다. 역시 간식은 감과 홍시, 귤이다. 바나나의 갈변 속도가 너무 빨라 절반 쯤은 버렸다. 책을 사주기로 약속해 오래 전 선물 받은 문화상품권을 사용했다.
무지출을 5일 동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지금껏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냉장고에는 여전히 냉동 도시락과 볶음밥, 만두, 피자가 들어있다. 곧 아빠의 김장 시즌이 시작될 것이므로 신김치도 빨리 먹어야 한다. 다음주는 김치볶음밥과 김치찌개, 고구마 맛탕과 군고구마가 주식을 이룰 것이다. 냉장고를 비우며, 소비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언젠가 해먹어야지 했던 유부초밥도 유통기한을 하루 넘겼다. 키토 김밥을 싸보겠다며 산 김밥 김도 여전히 부엌 한 켠에 있다. 차라리 김밥이 먹고 싶을 때 김밥 가게에 가는 게 더 실용적이다.
배달과 포장, 택배가 줄어드니 플라스틱과 종이, 비닐의 양도 확실히 줄어들었다. 무지출은 나의 소비에 대한 반성과 지구를 위한 작은 노력이다. 소비의 즐거움에 취해, 남이 해주는 음식의 편리함에 취해, 너무 안일했다. 특히 아이들의 투정이 전혀 없었다. 5일은 감과 홍시, 귤을 먹고, 같은 반찬을 몇 번 반복해서 먹어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진 음식이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다음주도 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