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부정

by 김대식


<존재와 부정>


0. 들어가며


딸아이와 아내가 물에 떠내려가는 비극. 누굴 살릴지 고민하는 남자.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비극은 참으로 ‘비정’하지 않은가? 그는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의 옆에 다가가 누구를 살리는 것이 더욱 이득이 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그의 고통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이런 비극과 무례는, 우리 주변에 이미 들어와 있다. 아내와 딸만큼 소중한 것들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스러져가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세계의 비정함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존재한다는 것


부정의 반대말이 인정이라면, 존재는 그 자체로 인정을 포함한다.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세계로부터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에 그 존재가 인식되었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그 자체로 증명한다. 우리가 어떤 것의 ‘존재’를 포착하고 확인, 호명하는 것 자체가 그것의 존재적 특성을 진리로 만든다. 어떤 것이 우리의 물질세계, 지구, 가능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어떤 것을 우리가 사고하고 인식하는 순간-존재를 떠올리는 순간, 그것은 그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뿔이 달린 말’의 예시를 통해 이를 파악해보자면, 우리 물질세계에 이런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나 우리가 이를 부르고 있으며 호명하고 있으므로, 이는 우리의 사고 속에 포착되고 인식되며,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존재가 반드시 우리 실제 물질세계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고 속에 존재할 수 있으며, 인식되었다는 순간 그것을 무로 보지 않고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 여기에서의 설명이다.



2. 역설적 의미의 부정


이렇듯 존재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인정과 결부된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그것을 떠올리고 존재에 관해 토론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개념에 대한 것이며, 그것의 존재를 물질세계, 논리의 세계에서 쫓아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존재 자체를 무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정하지 않으려는-부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정된 ‘존재’에 대해 가능한 것이므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시도를 인류는 시도한다. 개인은 어떤 존재를 무로 돌리기를 원하며, 제거하고 싶어 한다. 이는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세계의 욕구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의미에는 단순히 우리의 몸이 세계에 있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욕구와 우리만의 요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욕구가 세계에 용인될 수 없을 때 우리는 괴롭다. 세계가 사랑하는-용인하는 욕구와 다른 욕구는 부정을 요구받는다. 이미 존재하기에 인정되는 것을, 부정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역설적인 행위로, 세계의 폭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세계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우리 역시도 세계의 입장을 이해하고, 세계에서 살아온 이로서 세계의 폭력을 납득하게 된다. 따라 세계를 부정하고 지우려는 시도를 하기보다는, 자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방식을 주로 택한다. 그러나 세계로부터 이런 부정을 요구받은 이는, 분명히 슬프고 괴롭다. 자신의 욕구를 차라리 영원히 알지 못했더라면 세계와 공명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나, 자신의 욕구를 알게 된 순간 세계로부터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이 되며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세계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한 명의 인물을 함께 바라보자. 살인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는 이를 떠올려보라. 분명한 자신의 욕구를 느끼는 이의 입장에서, 그는 이 욕구를 단순히 실현하려 하겠는가? 그는 욕구를 인식하기 이전에 세계에 살아오고 적응해오며, 살인은 용인될 수 없는 행동으로 배워왔을 것이며, 그에 납득해왔을 것이다. 또한, 그가 이성적으로 떠올리기에도, 살인은 자신이 결코 당하고 싶지 않은 행위이며, 보편화 될 수 없으므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이다. 따라 이는 자신의 욕구를 느낌과 동시에,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사고를 강하게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욕구를 부정하게 되는 순간이다. 세계로부터 배워온 이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이가, 세계로부터 요구받으며 당장 이성으로 용인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부정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어필하는 욕구를 부정하든, 자신을 가르쳐오고 통제하고 있는 세계를 부정하든, 두 갈림길에서 그는 선택해야 한다.


이는 딸아이와 아내가 물에 빠진, 한 남자의 고뇌를 보는 것과 같다. 그 둘 중 단 한 명만을 구할 수 있어 한 명을 구했다면, 그는 둘 중 한 명을 사랑하지 않아서 한 명을 선택해 구한 것이겠는가? 단지 이 끔찍한 비극은, 하나의 사랑만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사랑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그 선택이 맞고 틀렸고, 결과적으로 어떤 결정이 되건, 이 결정에 처한 상황 자체가 너무나 괴로우며 슬픈 것이다. 개인의 욕구와 세계 사이의 갈등은, 이런 것이다.



3. 세계의 비정함


하나의 선택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부정해야 하는 무언가를 존재시키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세계의 이런 요구는 비정하다. 부정해야 하는 욕구를 애초에 존재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부정 해야 하는 욕구를 가지지 않는 개체만으로 세계를 구성했다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세상은 부정해야 하는 존재를 인정(존재)시킴으로써 역설적이고, 개인에게 고통을 준다.


부정해야 하는 욕구가 이미 존재한 세계에서, 이러한 욕구를 탄압하고 부정하기를 요구하는 세계의 판단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계로서도 자신의 유지를 위해 이런 요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살인의 요구를 모두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세계의 요구들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우리 대다수는 이미 이러한 세계의 요구에 동의하고, 그 요구를 잘 지켜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이들의 요구와 존재를 지키기 위한 요구이고, 이 요구를 악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요구는 대부분이 세계의 도덕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가 선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들이다. 악하고 용인될 수 없는 욕구들을 부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도덕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글은 이러한 도덕과 세계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요구를 인정시키고 존재시킨 세계의 비정함을 보는 것이며 자신을 부정하게 된 이의 감정이 어떨지 고민해보는 것이다. 자신의 요구와 세계의 요구가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는 어떤 슬픔을 겪을 것인가? 깨달음의 시점까지 계속해서 사랑해온, 나의 모든 주변 이들이 사랑하는 세계와 이미 존재로서 인정되는 나의 욕구가 부딪힌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슬픔인가?


살인마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위험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중세에 태어난 모태신앙 동성애자를 생각해보라. 여태껏 가져온 신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사랑함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을 떠올려보라. 지금까지는 나에게 늘 웃어주던 사랑스러운 세계에 나의 핵심적인-은밀한 이야기를 전하는 순간. 나에게 칼을 겨누고 끔찍한 괴물처럼 나를 바라보게 될 것을 알게 된 상황을 말이다. 대부분이 이런 선택의 갈래에서 자신을 죽이고 부정할 것이다. 존재로서 인정된 나의 욕구를, 역설적이고 가혹하게 부정할 것이다. 혹시 나를 죽이지 않기를 택하며 세계를 부정한다면,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 될 것이다. 어제까지는 어머니와 같았던 세계로부터, 괴물이 될 것이다. 세계를 택하건 나를 택하건 그 슬픔은 끔찍하다. 존재로서 인정된 것을 부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의 슬픔을 어떠한가.



4. 비열한 자


자신을 부정하며 끔찍한 슬픔과 아픔을 겨누며 세상과 살아가는 이와 세계를 부정하여 영원한 박해를 당하는 이들을 생각해본다면, 세계는 아름다운 것이라며 남들에게 그 웃음을 강요하는 이의 모습은 얼마나 우스운가. 그들은 진정한 희생과 슬픔을 알지 못한다. 딸아이와 원수가 물에서 떠내려가는 순간에서 딸아이를 선택한 이가, 딸아이와 아내 중 고민하는 이의 옆에 가 분명한 선택을 하라며 조언을 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우스운가. 세계와 자신의 요구가 운 좋게도 공존할 수 있어, 부정의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 그들은 세계의 비정함을 모른다. 운이 좋다는 이유로 세계로부터 더 사랑받고 그 사랑의 가격을 치르지 않는 사람. 저렴한 사랑을 취할 수 있던 이들. 비정하게도 이들은 그 저렴함으로부터 세계에 더 잘 적응하고, 자신의 이해만을 세계에 전달한다. 부정의 슬픔을 택한 이들을 비겁하고 노력하지 않은 자로 취급하면서 고민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 비정한 세계로 인해 비열한 자들이 태어나고, 비열한 자들과 함께 세상은 더 비정해진다.



5. 글의 욕구


이 글의 목적은 세계의 비정함에 대한 공유이다. 세계가 받아들일 수도 없으면서, 괴로움의 욕구를 인정시킨 세상의 비정함이라는 성격을 보는 작업이다. 이미 그런 끔찍한, 부정되는 욕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탄압하고 통제하려는 세계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구가 존재하는 세계의 성격을 비정하다고 평가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 세계 속 개인이 왜 괴로운지에 대해 다수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 개인이 원하나, 그것의 실현은 말이 되지 않고 세계로부터 용인될 수 없기에, 개인은 자주 괴롭다. 세계의 비정함을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개인의 괴로움을 설명하고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부정의 괴로움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함으로써, 억울하게 탄압당하고 이성적으로 허용 가능한 욕구들에 대해 만들어진 과도한 사회적 규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살인의 욕구와 같은 욕구는 아마 영원히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지라도, 동성애와 같은 금지되었던 욕구 일부는 세계가 진보하며 정당화되고 있다. 금지된 욕망을 가진 이의 감정을 일부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성적 연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욕망에 대한 과도한 규범과 페습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여자는 미소를 짓는다. 여자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죽음이 살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 죽음의 병, 마르그리트 뒤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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