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텍스트를 이용하여 세상과 소통해온 현대 미술 거장
햇살이 따뜻한 오후, 현대 미술 거장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을 보러 아모레퍼시픽 본사로 향하였습니다. 전시를 진행하는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건축상을 휩쓴 명성답게 내부 곳곳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넓은 공간에 심플한 심볼로 정리된 네비게이션 UI를 보며 화장실, 엘리베이터에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그 크기와 간결한 디자인에 압도당했습니다.
* 바바라 크루거 (Barbara Kruger)
미국 출신의 개념주의 그래픽 작가로 개인이 권력에 침해받는 인권이나 남성 중심의 사회의 비판, 서구 문화의 메스미디어가 지니고 있는 모방과 모순, 그리고 과장된 소비행태를 비아냥대는 작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강렬한 메시지를 위해 흑백사진과 Red, 그리고 산세리프체의 Futura 폰트를 사용하여 작가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장치를 마련하였고 이 스타일은 추후 '슈프림(Supreme)’ 로고 디자인에 영감을 줬다.
1층 미술관 입구에서 마주한 상징적인 서체와 강렬한 메시지의 첫 작품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엄청난 첫 작품을 뒤로하며 전시회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더 커졌습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APMA GUIDE앱을 다운받아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작품 하나하나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의 눈을 멀게 하고 너의 두뇌를 유출한다
전시회 계단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바늘이 눈을 찌르는 듯한 장면이 보입니다. 계단참의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사이즈의 이 작품은 사물을 보고 세상을 인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각'의 기관인 눈이 첨예한 도구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크루거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안한 두 번째 한글 신작은 '제발웃어제발울어'입니다. 이 텍스트는 자체가 독립된 조형요소로써 자율적으로 기능하면서 압도적인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 작품으로 텍스트를 다루는 크루거의 방식이 과거 의미 중심에서 조형 중심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양상을 살필 수 있습니다.
'싸게 잘 샀다'와 '이 멋진 외투는 터무니없게 비싸다'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작품이 맞은편에 배치되어
대중매체와 광고가 만들어내는 소비주의의 판타지에 대한 작가의 풍자적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실 전체를 압도하는 이 대형 작품은 붉은 프레임 속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여성의 모습으로 자신의 손으로 눈을 가려 보는 행위를 차단하고 있네요. 크루거의 작업에서 '본다'는 행위는 '안다'는 상태와 직결되는 것이며 화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두 손이 가리고 차단하는 것은 보다 큰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맹수의 이미지와 함께 텍스트를 곱씹어 본다면, 현대미술품의 가격이 요동치고, 함께 잘 살아가는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고민은 주목받지 못한 채, 명성과 부를 향한 치열한 경쟁과 생존의 장이 되어가는 미술계에 대한 코멘터리로 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의 벽면에는 그녀 작품의 트레이드 마크인 사진과 텍스트, 그리고 텍스트를 강조하는 면으로 콜라주 된 작품들이 쭉 전시되어 있어 동선을 따라 가보며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기 좋은 구조였습니다. 또 각각의 작품에 아주 은은한 빛을 쏘아주어 시각적으로 주목성을 준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전시장의 네 벽과 바닥을 텍스트로 가득 채운 이 작품은 작가가 2017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텍스트의 크기, 배치, 간격 등을 세심하게 디자인하여 이미지를 능가하는 강렬한 시각적 체험을 제공하며 오직 텍스트 만으로 건축적 공간을 구축하였습니다. 전시의 제목과 동일한 이 작업은 작가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을 위해 새롭게 디자인한 미술관의 소장품이자 이번 전시의 대표작입니다. 텍스트들로 둘러 쌓인 공간 한가운데 서 있으면 멀미가 날 정도였고 그 안에서 나라는 개체는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은 작품이었습니다.
네 개의 기둥이 있는 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영상은 작가가 2010년에 제작한 영상 설치 작업입니다. 네 개의 채널은 마치 여러 사람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물부터 여러 종교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장면들, 권투 같은 스포츠가 하나의 오락으로 여겨지는 시선 등이 교차되며,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와 대사가 뒤섞인 채 관람객을 몰입적인 환경으로 이끕니다.
슈프림의 모티브가 된 빨간 면과 흰색의 볼드한 타이포, 흑백 사진과 액자의 빨간 프레임까지 작품 하나마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그레이 톤의 좁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작품이 주는 큰 아우라가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을 보며 공간에 과감한 텍스트와 면을 사용하면서 해학적이고 때로는 강렬한 느낌을 다양하게 줄 수 있다는 점에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 예술을 대중화시켜 보여주었던 그녀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전시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트릿 브랜드 슈프림의 로고도 바바라 크루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제법 날도 선선해지고 햇살도 따뜻한 가을이 오고 있네요. 가족들과 바바라 크루거 전시를 감상하며 리프레시하는 주말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