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만두를 좋아하니 네가 직접 만두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난 아직 어린이인데 왜 나에게 이런 것을 시키지'
툴툴거리던 기억이 또렷한 나는 당시 7살이었다. 엄마가 만두피와 만두소는 만들어 주셔서 빚기만 하면 되어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 수량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양을 정해 주셨는데 하루에 2,000개를 만들어야 했다. 일주일 넘게 만두만 만든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큰집이었던 우리 집은 명절이 되면 모든 친척들이 모였다. 명절 당일 제사가 끝나면 설거지는 오로지 남자들만의 특권이었다. 나는 설거지에 자신이 있어서 주로 내가 나서서 했지만 (물론 누나와 형이 막내인 나보고 하라고 했지만 말이다.) 자발적으로 하고 나면 다른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한 것도 있었다.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결혼을 하면 일 년에 명절이 두 번이니 본가와 처갓집을 돌아가면서 가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어려서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의 교육 철학이 남달랐다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의 이러한 교육 덕분에 나는 나도 자식이지만 며느리(사위)도 소중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뉴스나 드라마를 보면 명절이 되어 음식 준비부터 양쪽 집을 방문하는 문제로 갈등이 벌어지는 상황을 목격한다. 비단 드라마 속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며느리는 육체적 노동과 멘탈 붕괴에 시달리고 남편은 음식 준비는커녕 친구를 만나 놀러 나가는 경우도 있다. 제사가 끝나고 나서는 딸이 오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며느리를 저녁까지 있게 하는 시어머니로 갈등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가치관이 변하여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이러한 집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 부모님의 교육이 비현실적 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과 같다면 며느리 증후군은 사라지고 시댁과의 마찰은 분명 줄어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우리 부모님은 아들과 딸이 구분 없이 동일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명절이 되면 아빠, 엄마, 누나, 형을 비롯하여 나까지 균등하게 일을 배분하여 제사 음식을 만들었다. 7살인 꼬마였던 나에게 하루 만두 2000개의 할당량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부모님 나이가 되어 보니 부모님의 행동과 교육 방식이 참된 교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 아침도 막내딸에게 새 밥을 지어 주었다. 아침마다 막내에게 따뜻한 새 밥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지가 벌써 9년이 지나가고 있다. 1주일에 3번 정도는 하얀 쌀밥을 해주고 나머지 4번은 막내딸이 좋아하지 않는 잡곡밥을 해준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출근 준비도 가능하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막내딸은 알람 시간에 맞추어 스스로 일어나 내가 해 둔 아침을 챙겨 먹는다. 어머니나 누나가 집에 있는 경우도 예외는 없다. 이제는 알람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막내가 참 대견스럽다.
막내딸은 일어나면 스스로 이불도 개고 자기 방 청소도 곧잘 한다. 종종 설거지와 빨래 널기와 개는 것도 도와주고 있다. 딸아이 방 한쪽 벽면에는 오늘 무엇을 했는지 표시하는 기록표가 붙어 있다.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매일 스스로 체크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 막내딸과 상의해서 고안해 낸 방법이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운 생각과 습관을 막내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다.
돈을 상속하지 말고 머릿속에 넣어줄 수 있는 좋은 습관을 상속하라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의 저자 이규천 작가님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어릴 적부터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공평한 사고와 스스로 하는 자립심을 나는 오늘도 딸에게 전하고 있다. 나는 부모님 덕에 천천히 아빠가 되어가고 있다. 50대가 넘어가면서 나는 부모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려고 더욱 노력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내가 받은 사랑과 교육에 대한 가치관을 잘 받들어 끝까지 지키는 것이 그 노력 중 하나이다. 부모님에게 보석보다 귀한 것을 상속받았으니 내 자식에게도 장단점을 더 살려 베푸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배움의 갈망 앞에 주저하고 부족한 아빠이지만 매일매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