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듣는 엄마가 아닌 더 잘 보는 엄마로 성장하기
‘소리’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소음 같을 때도, 조용한 클래식 음악처럼 느껴질 때가 있겠다 싶었다.
더 잘 보는 사람으로 성장하려는 농인 부부에게 어느 날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아들 예준이는 우리와 다르게 소리를 알아가고 있는 ‘작은 사람’이다. 아이를 ‘작은 인격체’로 대하면 대할수록 부모로서 숙연해지는 이유는 뭘까?
우리의 보호 아래 크고 있지만 머지않아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될 사람이기도 한 아이는 소리 가운데 농인 부모를 이해하고 있다. 진통 끝에 품 안에 안아 든 아이의 울음소리는 내 손바닥에 느껴지는 가슴팍의 진동으로 느껴졌던 것처럼 나도, 아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어느 날, 햇볕에 말랐던 아이의 옷가지를 개고 있던 내 어깨를 ‘톡톡’ 치던 그 손바닥에 내 마음은 이내 햇볕의 따뜻함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벌써 ‘엄마’라고 몇 번이고 불렀음에도 옷을 개는 데에 열중하고 있던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의 마음은 감히 헤아리기도 미안하다.
엄마가 뒤돌아보며 웃는 순간을 기다렸는지 이내 마주한 아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한 뼘 더 다가가게 됐다.
모든 날, 모든 순간마다 들려오는 소리에 더 귀 기울이기도 바쁜 와중에도 엄마가 그 소리를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이의 시선이 머무른 곳마다 엄마의 시선은 한 박자 늦게 머물러도 괜찮다.
‘소리’로도 채우지 못하는 우리의 거리는 얼마든지 가까이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걸 알아가는 엄마가 있기에.
아이의 미소는 엄마의 하루를 채워 준다. 엄마의 미소는 아이의 마음을 채워 주는 것처럼. 소리를 알지 못하는 엄마에게 ‘톡톡’ 따뜻한 감촉으로 대신 전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엄마의 시선이 더 따뜻하게 아이의 얼굴이 머물렀다.
유난히 햇볕이 오랫동안 우리 집을 비추던 그 날이었다. 그날의 오후 내내 우리는 빨래 사이로 오랫동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뽀송뽀송해진 빨래를 안아 들고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따라 걷는 아이의 걸음이 신났다. 엄마에게 소리를 알려준 그 마음이 뿌듯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