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은 사실 그동안 내게 막연하게 낯선 분야였다. 하지만 회사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내 일’과 얼마나 밀접한 단어인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저 일을 받아서 온전히 그 일에만 몰두하면 되었던 프리랜서일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디자인회사를 꾸려가는 모든 일에는 사실 마케팅이 필요하다는 걸 매번 체감하게 된다. 이건 개인으로서도 있지만 회사로서도 마찬가지다. 디자인도 마케팅처럼 목적이 뚜렷한 일 아니던가.
모든 서비스와 상품에 마케팅이 밀접한 시대에, 디자이너는 프로세스 특성상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갑자기 대뜸 찾아와 “하루만에 마케팅해주세요!”하는 경우는 없지만 “급해서 그러니 내일까지 만들어(디자인해) 주세요!”하는 경우는 많다. 실제로도 수없이 많이 겪었다. 디자인이 단순한 포장의 역할만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빠르게 해내야 하는 위치에 디자이너가 속해있다는 건 여전하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을 탄생시키기 위해 모니터 너머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이다. 반면 마케터는 탄생한 결과물을 어떻게든 세상에 더 많이 알리기 위해 발로 뛰는 사람이다. 특히나 책에 있어서는 마케터만큼이나 소비층을 생각하며 가장 애쓰는 사람이 디자이너가 아닐까 싶다. 책의 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긴 하지만, 이 ‘만들어나가는’ 행위에는 이 책을 보게 될 예상 독자를 고려하며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마케터가 책을 판매하기 위해 광고문구를 고심해서 쓴다면, 디자이너는 시안이 어떤 의도와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 설명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글쓰기의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책이 잘 팔리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마케터와 디자이너의 역할은 때론 같다.
"안전하다고 싶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다. 하지만 안전한 것은 예측 가능한 결과만 얻는다. 그러니 마케터라면 안전욕구를 벗어나는 생각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
‘판매’를 위한 직접적인 글을 쓰는 마케터와 달리, 디자이너는 ‘시각적 결과물’을 앞에 두고 간접적인 글을 쓴다. 간접적인 글이란 바로 디자인 시안을 설득하기 위한 글이다. 이 설득의 글에는 ‘진정성’이 담겨야 한다. 찰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어그로성 문장이나 이미 유행하고 있어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글은 잠깐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래가긴 어렵다.
이건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눈에 띄게(만) 하기 위해 강렬한 색상을 사용한다던지, 유행에 따라 같이 묻어가기 위해 안전하고 무난한 레이아웃을 활용한다던지 하는. 이거야 말로 ‘포장’만을 앞세운, 속이 빈 알맹이 같은 디자인이다. (물론 ‘보이는 것’에만 집중해야 하는 디자인이 필요할 때도 있다.) 당연히 클라이언트에게 이를 설득해 낼 수도 없다. 말 그대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무슨 설득을 하겠는가.
나는 언제나 디자인 시안을 만들고 클라이언트에게 시안을 메일로 보낼 때면, 각 시안이 어떠한 이유와 방법으로 나오게 된 것인지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왜 이를 제안하는지를 쓴다. 보이는 것(시안)만 전달하면 당연히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게 된다. 클라이언트가 속내를 짐작해 디자이너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눈앞에 있는 이 시안에 ‘어떤 탄생 비화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글쓰기는 디자이너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이제는 개인이 아닌 회사 이름으로 작업한 디자인을 설명하는 요즘은 한 문장 한 문장에 더 많이 신경 쓰게 된다. 아직은 1인 기업이라 회사가 곧 나고 내가 회사인 거나 다름없지만, 회사를 만들고 난 이후는 언제나 대표자의 마음으로 일을 대한다. 아마도 앞으로 계속해서 일을 통해 연결될 모습을 상상하며 글을 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시안을 내밀며 설득하는 글 외에도 요즘에는 회사를 알리기 위한 글쓰기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그동안 해온 일을 단편적으로만 알리기에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온라인에 한 번도 공개적으로 홍보해 본 적 없는 내게 이 일은 가장 큰 숙제 같은 일이지만, 어떻게든 해보려 안간힘을 쓴다.
쉬지 않고 일한 덕에 정말 ‘디자인’ 한 것만 늘어놓으라면 콘텐츠가 끊임없을 것 같지만, 그저 빈칸 채우기처럼 해온 일을 나열하고 싶지만은 않다. 내가 해온 일들을 다양한 시선에서 담아보고 싶다. 그 일환으로 지난여름엔 ‘교육 콘텐츠’ 분야에서 타깃별로 디자인을 어떻게 잡아나갔는지에 대한 아카이빙 시리즈 글을 발행했다. 아직까지 영향력 있는 채널은 아니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이런 시리즈를 발행해보고 싶다. 그래서 넓은 시야로 일을 대하는 디자인 회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기를 꿈꾼다. 언젠가 나의 이런 큐레이션 글을 통해서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누구나 볼 수 있는 단점은 누구나 안다. 마케터라면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마케터가 할 일이다. 마케터는 비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책을 알려야 하는 최전방에 있는 사람이다.”
2025년 3/4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읽은 책의 힘을 빌려 마지막 분기는 다시금 힘내볼 수 있을 것 같다. 대신, 힘을 조금만 빼고. 힘을 주고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하는 때도 맞긴 하지만 여기서 힘을 뺀다는 건, 그저 ‘완벽’에만 힘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이뤄야 해’, ‘반드시 해내야 해’와 같은 생각으로 완벽만을 추구하느라 주저했던 시간들을 잘 배웅해 주었다.
‘디자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해 글쓰기만큼 진입장벽이 낮은 일도 없다. 물론 판매가 이루어져야 그 효과를 증명하는 셈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글쓰기는 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동안 10년을 무탈히 프리랜서 생활을 해왔던 데에는 신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쌓이고 쌓여야 신뢰가 생긴다는 말처럼, 앞으로는 디디앤(dd&)이라는 이름으로 그 신뢰를 이어받아 10년, 20년을 더 걸어가고 싶다.
하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한결같이 글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