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은 관찰과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디자인으로 일을 시작한 지 올해로 18년이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제법(?) 오래 버텨왔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스스로를 홍보해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프리랜서였는데도 말이에요. 그러다 2019년도 즈음에서부턴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인스타그램에 포트폴리오 계정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홍보보다는 아카이빙이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2025년, 사업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사업자등록번호도 생겼으니, 가만있을 수가 있나요. 나를 알려야 했습니다. 정확히는 ‘회사 이름’을 알려야 했지요. 방문자도 거의 없는 홈페이지도 새 단장을 하고(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10년 넘게 개인 블로그로 쓰던 블로그도 카테고리를 재정비했습니다.
틈틈이 그동안 해온 일들을 블로그에 하나씩 정리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17년이란 시간 동안 해온 일에 대한 기록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작업량은 나름대로 굉장히 방대한(?) 수준입니다. 그동안 해왔던 주요 프로젝트를 먼저 올려보기도 하고, 하나의 주제로 아카이빙 해 시리즈로 연재글처럼 올려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급함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해온 것들을 다 소개하지도 못했는데, 최근에 끝난 작업은 물론 현재 하고 있는 작업까지 ‘소개할’ 것들의 항목이 점점 늘어나니, 왠지 속도가 안 따라가 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급함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맞게 가고 있는 방향도 ‘이게 맞나?’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니까요.
지난 프로젝트 결과물을 잘 보이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오히려 저를 아무 시작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프로젝트 결과물은 애초에 비주얼적으로 이야기를 논할 작업이 아닌데도 저는 ‘어떻게 하면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버렸고, 결국 한 해를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포트폴리오라고 소개하는 저의 글은 ‘우리는 이런 작업을 합니다’ ‘이런 결과물도 만들 수 있어요’와 같은 평범한 글이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단순한 결과물로만 승부를 보려면, 경쟁해야 할 상대가 너무나도 많다고 느꼈거든요. 또 결과물 한 장만으로 저를 소개하기엔, 너무나 짧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트폴리오’라는 이름으로 올리는 제 글에는 저만의 이야기가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고심하는 것. 이는 자연스럽게 관찰로 이어집니다. 관찰의 첫 대상은 그동안 해온 프로젝트였습니다. 나름대로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을 해오면서 쌓아온 것들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느 날은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주제’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분류 차원에서의 주제가 아닌, 콘텐츠로서의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브런치를 처음 만들었던 2019년, 저는 작가 소개란에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문장을 썼었습니다. 막연하지만 그저 외주 일을 받아서 만들어내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제가 해온 일들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만의 관점을 세우는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심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러다 보니 포트폴리오를 소개하는 일에도 꽤 많은 생각이 필요해졌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앞서 말한 관점을 세우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이 일을 이렇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그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물론 그 일을 시작하고 끝내며 또 다른 일로 연결시켜 내는 그 모든 과정의 시간 말입니다.
이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조급함이 사라졌습니다.(물론 아예 사라진 건 아닙니다) 하루에도 끊임없이 스크롤되는 화면 속 즉각적인 반응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SNS보다 오히려 사고의 끈이 길어야만 표현 가능한 매체를 통해 저를 보여주는 게 더 잘 맞다고 느꼈습니다. 저의 조급함은 사실 SNS로부터 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작업의 결과물만을 척도로 증명하는 글보다는, 제가 해온 일들이 어떤 관점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생각뿐 아니라 제가 해온 일 역시 그렇게 하나씩 끝나고 사라진 적은 없었습니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 다른 프로젝트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소개가 소개로 이어져 별다른 홍보 없이도 10년을 오롯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제 경험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문장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번 대학원 면접 준비를 통해서 그동안 제가 해왔던 일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각각의 작업, 각각의 경험을 따로 떼어놓고 봤다면 쉽게 설명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을 서로 연결해서 깊게 들여다보았던 시간 덕분에 제가 해왔던 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에 대해 조금 명확해졌습니다.
깊게 들여다보고, 서로 연결해 보며 밀도를 높여가는 일.
그렇게 쌓아간 생각들을 모아
나만의 관점을 좀 더 뾰족하게 다듬어가는 일.
지금껏 해온 만큼,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해나가기 위해
계속 붙들고 가야 할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 그러니 결국 나는 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 오직 내가 하기로 결심한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내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