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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내가 갭이어를 통해 얻은 것

어느 디자이너의 갭이어

by 디자이너요니

2024년 4월에 퇴사하여 2025년 6월에 새로운 회사로 취직하게 되면서 나는 약 1년의 휴식기를 가졌다. 재취업을 위해 치열하게 달려가던 시간이었고, 회사에 속한 디자이너가 아닌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난 1년간을 천천히 되돌아본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3개월 동안 부모님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4년 된 장롱면허 딱지를 떼고 운전 연수를 받았고, 온라인 대학 상담심리학 학사 과정에 등록해 두 학기를 즐겁게 공부했다. 독일어 자격증도 취득했고, 독일 한글학교에 첫 출근해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놀면서 아동심리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즈니스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회사에 속한 디자이너로서는 알 수 없던 치열하고 흥미로운 무역 비즈니스의 세계도 엿볼 수 있었다.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요리, 베이킹, 화분 키우기, 글쓰기 등 여러 취미를 꾸준히 이어가면서 취미를 통해 기분을 정화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중 글쓰기는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함께 내 인생의 첫 책을 내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내 책이 교보문고에서 팔리는 것을 상상하며 두근거렸고, 그렇게 탈고를 마친 뒤 독일에서 다시 디자이너로 재취업하게 되었다.


이렇게 요약해 보니 꽤 성공적인 갭이어였고, 재취업까지 이어진 완벽한 시나리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매일의 현실은 정신적으로 쉽지 않았다. 나만 정체된 것 같은 기분에 우울함을 느꼈고, 대부분의 것들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감과 무력감도 겪었다. 그러나 회사를 다니며 "잘 풀리고 있다"라고 느낄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낼 수 있었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많이 넓어졌다.


이제 나에게는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도망갈 수 있는 취미들이 생겼다. 퇴근 후 달리기를 하고, 스레드에 몇 자라도 오늘의 생각을 적고, 화분에 물을 주다 보면 답답한 마음이 사라진다. 요리에 흥미가 생겨 직접 건강하게 차려 먹다 보니 몸이 훨씬 건강해졌고, 속 쓰림도 거의 사라졌다.


매주 토요일에는 여전히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친다.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떠들고 공부하다 보면 세상의 걱정이 다 사라진다. 잊고 있던 인류애도 충만해진다. 나와 잘 맞지 않는 동료들도 "저들도 예전에는 작고 귀여운 아이였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금세 이해하게 된다. 나에게 유난히도 부족했던 관대함이 조금은 생긴 것이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도, AI가 디자인을 하기 시작해도, 나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기 때문에 크게 불안하지 않다. 나는 디자인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통역도 할 수 있고, 한글학교에서 선생님 역할도 할 수 있고, 책을 쓸 수도 있고, 남은 심리학 공부를 이어가서 심리상담가가 될 수도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N잡러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자의로 혹은 타의로 ‘갭이어’를 가지게 될 때가 있다. 그 시간이 찾아온다면 주저하지 말고 꼭 가져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 시간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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