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어랑 산책갈까
“제가 청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달라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실낙원』 속 아담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일종의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다고 했어, 낳아달라고 했어?” 버전의 중2병 선언인데, 아담이라고 해서 정체성 혼란의 시기를 피해가진 못한 듯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꽤 넓게 쓰입니다. 소설 속 괴물도, 영화 속 크리쳐도, 오늘을 사는 창작자들도 모두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빅터에게 따집니다.
“나를 만들어 놓고 왜 무책임하게 버렸는가.”
빅터는 창조의 순간만 즐기고, 이후는 생각하지 않은 전형적인 “프로젝트 끝, 난 몰라”형 창조자였습니다. 흉한 얼굴의 괴물은 두려움 속에 방치됐고, 결국 외로움 끝에 빅터에게 요구합니다.
“내게 동반자를 만들어줘.”
하지만 빅터는 거절합니다. 같은 존재가 둘이면 번식할 수 있고, 그럼 더 큰 세계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창조의 욕망과 책임의 부재가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 구조는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반복됩니다. 엔지니어는 인간을 만들었지만, 인간이 기원을 묻자 창조자는 침묵합니다. 환영받지 못한 피조물의 질문은 끝내 비극을 낳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프레스티지〉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집니다. 테슬라의 전류 장치는 번개처럼 튀며 ‘창조’와 ‘복제’의 힘을 부여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이 번개로 생명을 얻었다면, 〈프레스티지〉의 엔지어(휴 잭맨)는 전기로 자신을 무한 복제합니다. 기술이 인간의 욕망을 대신 수행하고, 때로는 너무 충실하게 수행하는 장면입니다.
프랑켄슈타인, 프로메테우스, 프레스티지.
세 작품은 결국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창조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빅터는 탄생의 순간만 즐기고 이후는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디자이너도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화면과 브랜드, 기능을 만들지만, 결과물은 세상 속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어긋난 동선은 불편을 만들고, 방치된 기능은 누군가의 하루를 지치게 합니다.
디자이너는 떠나지만, 디자인은 남습니다.
빅터는 책임지지 않았고,
엔지니어는 설명하지 않았고,
엔지어는 윤리를 건너뛰었습니다.
디자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왜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만든 뒤 그 영향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작업들도 언젠가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제가 청했습니까, 디자이너여. 저를 RGB로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모니터 밖 세상으로 저를 끌어올려달라고?”
여러분은 지금, 창조자로서 이 질문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