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와… 여기에 계실 분이 아닌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

by 하니


오래 전, 소셜커머스 회사에서 나는 상품의 상세 페이지를 제작하는 '컨텐츠 디자이너'였다.

컨텐츠 디자이너는 디자인 팀에 묶여있는 게 아니라, 푸드면 푸드, 뷰티면 뷰티, 패션이면 패션 등 상품 카테고리에 따라 1~3명 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한 카테고리 팀에는 상품을 소싱해오는 영업을 담당하는 MD와 MD의 일을 보조하는 AMD, 상품 페이지를 기획하고 카피라이트를 만들어내는 에디터, 그리고 상품 페이지를 '잘 팔리도록'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속해 있었다. 이 얼마나 애자일한 조직인가!


나는 당시에 뷰티팀에 속해 있었다.

내가 뷰티 팀을 고른 이유는 다른 카테고리에 비해 뷰티는 상품 페이지에 디자인 할 요소가 많다는 것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었다.

수분감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표현하거나, 컬러 발색을 독특하게 보여주거나, 향기를 이미지화 하는 등 다른 카테고리에 비해 매력적인 디자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디자인 작업은 하루에 숨 쉴 틈 없이 3~5페이지를 뽑아내야 했고, 내가 한 업무는 '디자인을 얼마나 잘 했느냐' 보다 '몇 개의 상품 페이지를 쳐 냈느냐'로 정량적 평가가 되었다.

그리고 소셜커머스 특징 상 몇 일간 띄워진 컨텐츠 페이지는 판매가 종료되면 사라졌다.

뭐, 여기까진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회사원이란 원래 고달픈 법.

결정적으로 내가 현타를 느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사내엔 컨텐츠 디자이너 뿐만 아니라 UI 디자이너도 있었다.

컨텐츠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나와 또래인 20대 초중반의 사회 초년생인 반면, UI 디자이너 분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 만큼 경력이 많은 선배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자세히는 몰라도 뭔가 우리가 하는 일보다 심도 깊은 일을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우리처럼 하루에 시간을 쪼개어 몇 페이지를 쳐내는 작업이 아니라, 페이지 한 구석을 개선하기 위해 몇 일 동안 고민한다는 게 마치 ‘천상계의 일’처럼 보였다.


그들은 천상계의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당시에 내가 관심있어 하던 프로모션 디자인 작업도 도맡았었다.

자잘한 프로모션이 아니라 전사급의 대형 프로모션은 꼭 그들의 손을 통해 멋지게 피어났다.

어떻게 저런 디자인을 할 수가 있지? 어찌나 멋있던지, 보면서 늘 경외하고 동경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UI 디자인팀에서 리소스가 부족해 이번 전사급 대형 프로모션 디자인 작업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침 뷰티 카테고리의 프로모션이었다.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프로모션을 기획한 마케터 분이 난감한 얼굴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본 우리 뷰티팀의 정의로운 한 MD님이 “우리 팀 디자이너 분한테 담당 가능하신지 여쭤볼까요?”라고 했었을 것이고, 마케터 분은 마치 구원의 빛 줄기를 찾은 것처럼, 하지만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으로 “그렇게(라도) 해주세요!’라고 했겠지.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전사급 대형 프로모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얼마나 꿈꿔왔던 일인지, 이게 얼마나 다시 없을 귀중한 기회인지 알기에 거의 일주일 동안 새벽에 퇴근하곤 했다.

보여줘야 했다.

컨텐츠 디자이너도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나 이런 디자이너라고!!


그렇게 페이지를 완성했을 때, 마케터 분께서 했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와……. 여기에 계실 분이 아닌데요?”


당시 작업했던 프로모션 페이지. (개인 포트폴리오 발췌)



일개 초년생 컨텐츠 디자이너는 이를 갈고 기회를 노리다 드디어 때가 되어 뭔가를 보여주긴 했었나 보다.

비록 기회는 우연히 굴러들어 왔지만 준비되지 않았다면 요리할 수 없었을 테니.


내가 한 작업은 강남역 11번 출구의 대형 스크린에도 뜨고, 지면 광고에도 뜨는 정말 꽤나 대형의 프로모션이었다.

덕분에 매번 하던 PC 버전의 상세페이지가 아니라 모바일 페이지와 전시 페이지에 붙을 딱지 디자인, 사이트 이 곳 저 곳에 띄울 다양한 배너 배리에이션과 마케터, 개발자와의 커뮤니케이션까지.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가 있었다.

가장 뿌듯한 건, 그 후로 몇 번의 전사급 대형 프로모션 작업 기회가 더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UI 디자이너 뿐만 아니라 컨텐츠 디자이너도 이런 복합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된 것이다.

뷰티팀 뿐만 아니라 다른 카테고리에도 속속들이 기회가 전해졌다.


어쩌면 그 분들은 “이야, 저 쪽에서도 프로모션 작업이 가능하네! 앞으로 이건 맡겨버리자.” 라고, 귀찮은 짐을 후련하게 떠맡긴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컨텐츠 디자이너는 ‘내가 왜 이런 부담스러운 일을 해야 해!’ 라고 피로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갈증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업무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나는 이 경험 덕분에 팀 내에서 최고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후 UI 디자인 쪽으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얻을 수 있었다.


UI 작업만 하다 가끔 프로모션 작업을 맡게 되면 아직도 그 때가 떠올라 설레인다.

종종 면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망설임 없이 대답하곤 한다.

그 어떤 어려운 UI/UX 개선, 구축 작업보다도 십 수년 전에 작업했던 이 프로모션 디자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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