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오래 돈 벌고 싶은 사람의 넋두리
작년 초에, 우연히 이 기사를 보았다.
“넥슨컴퍼니 사상 첫 정년퇴직자가 등장했다” -> 기사 원문 링크 / 정년퇴직 개발자 인터뷰 링크
요즘처럼 회사에서 오래 일하기 쉽지 않은, 특히 IT업계(게임업계는 더더욱…)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정년퇴직]이라는 단어가 업계에 등장한 것이다. 수많은 뉴스의 홍수 속에서 나는 이 기사가 정말 와닿았고, 그때 개발자 남편을 둔 친구랑도 이 주제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개발자도 정년퇴직 나이까지 일할 수 있을까? 디자이너도 그때까지 일할 수 있을까? 나도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나이까지 일할 수 있는 건가?
10년 넘게 일하는 동안, 30대 초반까지는 40, 50 이후의 삶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20대에는 나의 커리어를 쌓으면서 당장의 적금과 생활비, 용돈을 버느라 급급했고 30이 넘어가서야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여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나는 인생의 새로운 고민을 또래 사람들처럼 하고 있다. 앞으로 더 나이 들어서도 먹고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가 40대, 50대 넘어서도 디자이너를 하고 있을까?”
보통 이런 고민을 한다면 지금처럼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사업을 하거나 아예 다른 진로를 생각한다. 디자이너 스튜디오를 차리거나, IT 서비스를 론칭하기를 꿈꾸기도 한다. 때때로 열악한 디자인 환경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힘들어해서 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길을 생각하기도 한다. 내 주변 사람들도 각자 매우 다양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으며,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일찍이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도 꽤 많다.
그렇지만 나는 디자이너 직함을 정말 오래 달고 싶다. 일찍이 [디자이너]를 과감히 내려놓고 자신만의 사업을 준비하거나 다른 공부를 시작하려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나는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해서, 내 스튜디오를 차려서 대표 디자이너가 되는 거 말고 한 회사에 소속되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다. 내 성격상 사업을 벌일 재목이 절대로 되지 못하고, 사업하면 따라올 수많은 경영관리 업무를 감당할 자신도 없다.
이쯤 되면 이 사람 왜 이렇게 회사를 나오는 것을 무서워하냐 하겠지만, 그 정도로 나는 리스크를 감내할 사람이 못 된다.(눈물) 그래서 나는 그 누구보다도 회사에 소속된 디자이너로 오래 일하고 싶어 한다. 이 회사가 갑자기 망한다 해도, 나는 또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다.
경력이 10년 이내의 중니어(주니어와 시니어 그 사이)까지는 이직은 대체로 수월하다. 연차도 쌓이고, 내 프로젝트 커리어도 쌓이고 그만큼 포폴도 점점 두꺼워진다. 그리고 업계가 돌아가는 상황도 눈대중으로 파악이 되다 보니 (그리고 이르면 디자이너 채용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직을 하게 된다면 이전보다 보는 눈도 생겨난다.
그러나 경력이 10년이 넘어가면 그 이직이 점점 힘들어진다, 아니 이직의 문이 좁아진다. 10년의 경력이라면 주로 리더를 뽑을 테고, 이전 글들에도 얘기했지만 리더는 대체로 주변의 추천과 스카웃으로 채용한다. 경력이 많은 사람을 뽑는다면 [시니어 000]라는 이름의 실무자를 채용하며, 이 경우에는 너무 경력이 많은 사람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 시니어 경력은 7~10년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번 디자이너 채용에 참여하면서 마음속으로 불안해했다. 나도 이제부터 이직이 힘들어질까? 진짜 리드가 되지 않으면 이 다음 스텝은 없는가? 더 나아가서 지금 다니는 회사가 갑자기 공중폭파해서 졸지에 구직자가 되면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까 등등등. AI가 디자이너를 대체하네 마네 하는 세상 속에서 불안감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B팀장님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떨어지면 디자이너를 접고 친구의 사업을 도와줄 마음까지 가졌다고 했다. 친구 E는 만약 이 회사를 그만두면 더 이상 디자이너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기에는 디자인이, 미술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그동안 미술하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이 레퍼토리는 절대 아니고… 지금도 그림을 좋아하고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착착 그려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래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케팅 디자인 역시 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마케팅 디자인으로 오래 일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 이것도 앞으로 글로 쓰겠지만(글을 쓰던 중에 글감이 생겼다!) 마케팅 디자인 영역에서 경력이 높은 사람이 할 수 있을 일을 찾고 있다. 앞서 얘기했던 피드백이나 유관부서 커뮤니케이션도 있고 좀 더 [마케팅 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파고들려고 한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기도 하기 때문에 프로젝트 진행하는 동안은 내가 크게 도약할 수 있겠다 해서 안주하려는 마음을 떨쳐내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실패하면서 나아가려 한다.
나는 아빠도, 형제도 공무원이다 보니 정년퇴직의 과정을 옆에 지켜본 사람이다. 100세 시대에 60까지 일하는 것은 너무 짧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돈을 벌고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변화하고 트렌드가 바뀌는 IT업계의 디자이너로, 내가 아빠처럼 정년퇴직을 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어느새 나 자신을 끝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일할지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다. 좋아하는 디자인 일로 오랫동안 돈을 벌기 위해서 끊임없이 미래를 고민한다. 우리 회사에서도 40-50대 임직원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데 회사 최초 정년퇴직자가 나올 수 있을까? 그보다 IT 업계에서 최초의 정년퇴직 디자이너도 나올 수 있을까? 지금은 그저 한 치 앞 미래도 모른 채 걱정하고 있지만 나는 정년퇴직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아니 정년퇴직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50살까지는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