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가 마케팅 디자인을 계속 하는 이유
"HYO님이 아는 디자이너 중에 마케팅 디자인 쪽으로 오래 일한 사람이 있나요?"
팀장님과 얘기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생각해 보니 같은 회사에서 함께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 몇을 제외하고 다른 회사에는 없는 것 같다. 나의 인간관계가 매우 좁은 것도 있겠지만, 실제로 예전에 같은 필드에서 일했던 디자이너는 현재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디자이너들과 얘기할 때나, 리더들과 1 on 1을 진행할 때에도 마케팅 디자이너로 꾸준히 일하는 것에 대해 자주 얘기가 나올 때가 있다.
이전 글에서 마케팅 디자인이라는 필드를 나 혼자(?) 새롭게 정의해 보았는데, 이름은 이렇게 정의 내렸어도 결국 매일 쏟아지는 배너 디자인 요청을 처리하는 일이다. 대부분 반복업무이며, 오래 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런 배너 제작만 해야 할까" 피로감을 느끼고 다른 브랜드 디자인이나 프로덕트 디자인 등 디자인 분야로 전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만 10년 넘게 하고 있다. 중간에 프로덕트 디자인으로의 팀 이동 제안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마케팅 디자인 필드에 있다. 그만큼 이 일에 대한 애정이 크고 이 일을 좋아한다. 그러면 난 왜 이 일을 오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왜 마케팅 디자인을 좋아할까?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미술 쪽으로 진로를 선택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주변에 나보다 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았고, 디자인 필드에서는 사실 그림을 그릴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마케팅 디자인을 하다 보면 비주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이 많다 보니 드로잉을 거쳐야 하는 순간이 꽤 많았다. (나는 특히 포토샵 작업 전에 손으로 대충 스케치를 해보고 작업을 진행한다) 페이지라는 여백에 이벤트 내용과 어울리는 컨셉의 그래픽이나 아트를 채워야 하는 것이 마케팅 디자인이다 보니 컨셉을 잡고 그래픽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너무 재밌었다. 나에게 디자인은 최대한 덜어내고 그래픽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아트워크를 그리고 디자인에 넣어도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구나 깨닫게 된 영역이 바로 마케팅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배달의민족 캐릭터 배달이 친구들이 확고하게 있다 보니 회사에서도 드로잉 실력을 많이 요구했다. 이러한 회사의 니즈와 나의 드로잉에 대한 애정이 겹치다 보니 더더욱 이 업무를 즐겁게 했던 것 같다. 물론 회사에서 마케팅 디자인 업무 외에 다른 곳에서도 배달이 캐릭터를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주로 배달이를 보여주는 필드는 배너나 이벤트 페이지 영역이었다. 그래서 마케팅 디자인에서 더더욱 직접 그린 배달이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페이지를 만들 수 있어! 병아리 디자이너였던 나에게는 이보다 더 매력적인 필드는 없었다.
이벤트 페이지나 배너를 오랫동안 제작해 보면서 느낀 것은 [절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배너를 만들면서 좀 더 후킹 하는 카피를 역제안하려면 마케팅에 대한 이해도나 작문 실력도 있어야 하고, 페이지를 만들면서 다소 어렵고 복잡한 이벤트 진행방식을 쉽게 보여주기 위해서 UX 방면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여기에 사용자가 직접 참여하는 페이지 플로우(flow)를 만들어내려면 개발 지식도 알아야 한다. 더 눈에 띄는 배너 또는 비주얼을 위해 모션그래픽 제작도 해야 한다! (나도 내가 이 회사에서 애프터 이펙트를 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전의 브런치 글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마케팅 디자인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며 꽤 여러 분야에 대해 다양하게 알아야 한다. 주니어 시절에는 이렇게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 생각하면 학생 시절이나 사회 초년생 시절 그저 스쳐 지나가면서 배웠던 관련 지식들이 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마케팅 디자인을 해보다가 UX 공부를 더 하다가 프로덕트 디자인으로 전향할 수도 있고, 페이지 문구나 알림 창 문구를 고민하다가 UX라이터로 전향할 수도 있다. 마케팅 디자인은 계속 들어다 볼수록 하이브리드(hybrid) 디자인 영역 같다. 되게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매우 다양한 영역의 지식을 요구한다. 그래서 마케팅 디자인은 더 매력적인 디자인이다.
이전에 학교를 다니면서 광고디자인 수업을 들은 적 있었다. 광고 디자인은 참 매력적인 분야로 학생들에게 유명했는데 극악의(?) 광고업계 업무환경도 유명했다.(광고업계에서 일하시는 분들… 지금도 그러한가요?) 학생 시절에는 내가 사회에 나간다면 광고 디자인이나 그 비슷한 것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난 지금 [그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배너 역시 자사 서비스를 홍보하고 어필하는 영역이고, 간간히 진행하는 캠페인은 광고 대행사나 제작사와 함께 진행한다.
마케팅 디자인은 광고 디자인이 온라인 영역으로 옮겨온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광고 캠페인이나 이벤트를 기획하고 제작 또는 디자인 후 라이브(live)한다. 캠페인에 비해 늘 제작하는 페이지와 배너는 주기가 굉장히 짧다는 특징이 있지만, 진행 방식은 광고와 얼추 비슷했다. 그리고 특정 시즌(국제 행사, 스포츠 경기, 설 명절, 수능 등)이 되면 일이 많아지고 정신없이 바쁜데, 이상하게 이 주기가 되면 너무 바쁜데도 재밌게 일한 기억이 있다. 왜 바쁘고 정신없는데 재밌지?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보다 더 좋은 카피가 없을지, 배너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사용자에 눈에 띄게 하는지, 이 이벤트에서 제일 중요한 킥 포인트가 뭔지를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는 꽤 재밌는 일이었다. 마케팅 디자인 외에도 마케팅 관련된 것들은 나에게는 (힘들지만) 흥미로운 업무들이다.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이 일을 왜 오래 하고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 성격 상 내가 싫어하는 것은 절대로 오래 하지 않는다. 만약에 마케팅 디자인이 지겹다고 느끼거나 지금보다 덜 좋아했다면 나는 다른 디자인 분야로 전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1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적어도 나에게는 오랫동안 재미있을 분야다. 만약 다른 일을 하더라도 마케팅 디자인 관련 일을 할 것 같다. 마케팅 디자인이 지겨워질 때에면 그와 연관된 일 중에서 재미를 찾아가고 있겠지.
점심을 먹다가 팀장님이 던진 질문 하나로 [내가 마케팅 디자인을 왜 좋아하는지] 끄적여봤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다. 나에게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동기는 [좋아하는 마음]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지금 자신의 일(돈을 벌기 위한 일 외에도 다른 일도!)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그 일을 왜 좋아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