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계속 변하고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얼마 전, 이런 메일을 받았다. 영어로 된 메일이어서 스팸메일, 또는 해외 래퍼런스 사이트 뉴스레터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 사용했던 준 프로토타이핑 툴 인비전(invision)이 올해 연말을 끝으로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메일이었다. 인비전은 디자이너의 결과물로 쉽게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유관부서와 공유하는 툴이었다. 나는 이 인비전을 여러 플로우를 거쳐야 하는 이벤트 페이지 디자인 시에 잘 사용했다. A버튼을 눌러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고, 팝업이 뜨는지 등을 프로토타입으로 보여줘야 확실히 디자인 이해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비전은 피그마의 급부상과 함께 인지도가 점점 떨어지더니 결국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또 다른 그래픽 툴이 기억 속에 묻혔다.
디자이너가 주로 사용하는 그래픽 툴은 이처럼 계속 바뀌었는데, 최근 들어 AI가 매우 핫하다. AI(챗gpt)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겠다는 말(관련 뉴스 링크 : 국내 기업 관리자 70% "AI 할 줄 모르는 지원자, 채용하지 않겠다")이 나올 정도로 AI는 어느새 우리 삶에 깊게 들어왔다. 특히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생성형 AI(미드져니, 어도비 파이어플라이, 스테이블 디퓨전 등등)을 활용해서 작업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어도비 같은 그래픽 툴을 만드는 거대 기업까지 주목했다. 하지만 그동안 오랫동안 일했던 과거를 돌아보면, 생성형 AI 말고도 그동안 디자인 업계에서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AI의 등장에 견줄 만하겠냐마는, 변화는 항상 있었다. 매번 변화하는 업계이지만,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이 변화에 맞춰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공부하는 것이 디자이너(또는 이 업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잠시 라떼 얘기를 하자면,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온라인(특히 모바일) 계통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지금 얘기하는 브랜딩 디자이너를 진로로 정하고 있었고, 뺀질나게 인쇄소를 들락거리기도 했고 인쇄물을 제작하는 디자인 알바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직장에서 모바일 앱의 세계를 만나고 나서는 온라인 디자인으로 전향했다.
당시에 내가 다닌 학교에서 웹 디자인 분야는 마이너한 분야였다. 졸업 전시 당시 모바일 앱 또는 UI 디자인 분야가 없어서 웹 디자인으로 졸업작품을 제출했었는데, 그 웹디자인에서는 나를 포함해서 졸업생 중 단 2명만 해당 분야에 작품을 제출했다. PC 기반의 웹 디자인은 익숙했지만, 모바일 기반의 앱 디자인은 아직 생소했던 시기였다. 학교 수업을 통해서 코딩 언어를 접한 나는 엄청나게 긴 코드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웹 디자인으로의 길은 진작에 포기했었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모바일 웹 기반의 마케팅 디자인을 시작하고 나서 얘기가 달라졌다. 다행히도 나는 회사에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UI의 기본과 웹(모바일, PC)에 대한 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앱과 모바일 웹 디자인 업무를 진행했다. 당시 나는 직접 이벤트 페이지를 제작하고 이를 웹 코딩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직접 모바일 앱에 라이브 시키는 일까지 맡았다.
앞서 나는 코딩 언어를 보고 겁을 먹었다고 했는데, 막상 이를 접하고 나니 오히려 오프라인 디자인에 비해 훨씬 재밌고 편했다. 무엇보다도 당장 수정과 배포가 용이하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오프라인 디자인은 수정하더라도 이미 발주로 넘어가면 고치기 어렵다.(예전에 이걸로 사고 친 기억이…) 사실 이 때문에 오프라인 디자인에서 온라인 디자인으로 전향(?)했다고 할 수 있다. 졸업전시에 쓸 돈만 벌고 그만두겠다는 알바는 어느새 같은 회사에서 13년차 디자이너가 되어 일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막 IT기업 붐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던 때에 모바일 앱 회사를 만나서 물살을 잘 탄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이후로 한창 지나고 나서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때에도 코딩을 무서워해서 웹 디자인을 더 이상 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뒀다면? 계속 오프라인 디자인을 고집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다른 멋진 회사에서 브랜딩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딩, 그리고 모바일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한 발자국 들인 덕분에 앱 서비스라는 신세계로 시야가 넓어졌다고 자신할 수 있다.
PC웹, 오프라인 디자인만 존재하던 디자인 세계에서 모바일 디자인, 프로덕트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등장하고 나서 UI 디자이너, 즉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 분야가 되었다. 그에 따라 사용하는 디자인 툴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의 디자인 툴 역사는 아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픽 퍼포먼스의 중요도가 높은 마케팅 디자인의 특성상 아직도 포토샵의 중요도가 크지만, 모바일 웹(또는 앱)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프로덕트 디자인 툴의 변화와 결을 같이 한다.
1번째 툴) Adobe 포토샵(photoshop)
예전에 포토샵으로 초창기 배민 앱의 카테고리 아이콘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작업 후 레이어를 정리하고, 앱 화면에 대한 가이드 역시 포토샵 파일에 별도 폴더로 저장해서 일일이 모두 표시했다. 심지어 포토샵으로 작업한 디자인을 개발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가이드 제작 플러그인도 도입하려 했다.
2번째 툴) 스케치(sketch) + 제플린(zeplin)
포토샵은 스케치(sketch) 툴의 등장으로 UI 화면 작업 툴로서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스케치는 훨씬 더 UI 화면 작업에 용이하게 설계되어 있었고 이 스케치 툴과 연동되는 제플린 툴로 개발자와 손쉽게 업무에 대해 소통이 가능했다. 이제 가이드를 하나하나 그리지 않아도 제플린 링크 하나로 앱 화면에 필요한 이미지 파일과 폰트 정보, 마진값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때 Adobe XD를 사용하는 회사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당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아서 이 글에서는 패스하겠다)
3번째 툴) 피그마(Figma)
스케치의 큰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파일에 대한 실시간 업데이트가 제때 공유가 안된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파일을 개별 보관하는 것이 아닌 클라우드(cloud) 시스템의 툴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피그마였다. 피그마는 빠르게 급부상했고, 현재 대부분 앱 서비스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툴이 되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들 외에 나의 디자인 작업에 거쳐간 수많은 유료/무료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큰 변화의 가닥으로 보자면 이 3가지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변화했다. 내가 어떤 툴을 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관련된 플러그인이나 프로그램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새로운 툴을 익히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특히 포토샵에서 스케치로 옮겨갔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익숙했던 인터페이스에서 새로운 인터페이스로 갈아타는 것, 손에 익은 단축키 대신 다른 단축키를 익히는 것, 프로덕트 용어와 규격 단위를 외우는 것 등등. 그러나 스케치 툴을 배우는 기간은 [마케팅 디자인에서 UX 관점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이벤트 페이지에서 예쁜 디자인 말고도 사용성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업계 트렌드가 변하는 만큼 디자인 트렌드도 변하고, 이에 맞춰서 디자이너가 사용하는 도구도 변한다. 이제는 그 도구가 점점 생성형 AI로 변하는 추세인데, 이번에도 역시 이 새로운 툴을 배워야 할 때가 왔다. 오래 일한 디자이너도 트렌드에 맞춰서 꾸준히 공부하고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것이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세상은 냉혹해서(?) 업계 흐름에 뒤쳐진 프로그램은 빠르게 잊혀진다. 예전에는 내가 자주 썼던 툴이 서비스 종료와 함께 역사 속으로 잊혀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0년이 넘은 기간 동안 일하면서 툴 말고 개념을 익혀야 하는 순간이 온다. 아마 주니어 디자이너라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스킬과 창의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그리고 이 2가지 중에서도 아마 스킬 비중이 높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포토샵 스킬이, 드로잉 실력이 내 커리어에 엄청나게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스킬보다는 디자인과 관련된 [개념]이다. 대학교 시절에 흔히들 [이론]이라고 말하며 가르치던 것들. 인문학, 심리학 같은 기초 학문. 일하면서 이런 학문을 다시 찾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몇 년 전, 어느 책을 보다가 “인문학에 대해 좀 더 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매니징이나 리더에 대해 막 고민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읽던 책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책에는 수많은 학자들의 논문 문구와 말들이 인용되고 있었다.
좁게는 내가 일하고 있는 디자인 분야, 더 넓게는 디자인에 관련된 마케팅이나 사업 분야,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조직 생활에 은근히 배우면 도움이 되는 학문들이 있다. 아마 대표적으로는 심리학이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역량을 키워야겠다며 들여다보고 있는 UX 쪽에서는 심리학이 꽤 중요하다. 실제로 관련 서적들이 많아서 동료들과 북스터디를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신입-주니어 단계에서는 그래픽 퍼포먼스와 이를 위한 스킬업이 중요하다.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 알아야겠다]는 순간이 올 것이고, 내가 일하는 데에 필요한 기초 학문을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때 관련 책들이나 정보를 훑어보면서 알아가면 된다.
예전에 주니어 꼬꼬마 시절에 같이 점심을 먹었던 분들 중 엄청나게 오랜 경력의 개발자가 있었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 회사 연령대는 나름 젊은 편이었는데, 그 연령대에 비하면 나이가 있는 분이었다. 그때 그분에게 지금까지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을 때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그분은 일하면서 개발 언어가 계속 바뀌는 것을 경험했을 테고, 그에 맞춰서 새로운 개발지식들을 공부했을 것이다.
아마 배움과 공부에 대한 잔소리는 주변에서 끊임없이 들려올 것이다. 스스로 스터디를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회사에서 교육을 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에 금방 지칠 수도 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바로 해보는 성격이 못되는지라 가끔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에 금세 지쳐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럴 때마다 [꼭 저 속도에 완벽하게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만의 속도를 찾으려 한다. 빠르지는 않지만 내 페이스대로 새로운 것을 익혀가고 있다.
개발자도, 디자이너도, 그 외의 IT종사자들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IT업계에서 변화에 적응해야 오래 일할 수 있다. 물론 이 변화의 속도에 맞춰서 너무 빨리 달리기만 하면 분명히 지쳐서 나가떨어지겠지만. 나만의 속도를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조금씩 시도하고 배워본다면 내가 일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