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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용규 Mar 04. 2020

공사 현장과 을지로

이 둘은 친한 사이




여름이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한창 진행 중인 공사 현장이 있어서 감리를 하기 위해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다. 새벽부터 나가서 계획했던 대로 진행이 되고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운 채 확인을 하며 미팅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점심이 지나고 사진 찍기 좋은 오후의 햇살이 드리워진다. 현장에서 핸드폰과는 다르게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어느새 인기쟁이가 되어있다. 일하시는 분들이 여쭤보기도 하시고 아직도 필름 카메라 찍는 사람이 있냐고 웃으시기도 하셨다. 개중에 오랜만에 보셔서 감회가 새롭다는 분들도 계셨다. 공사 현장 안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빛이 현저하게 부족해서 굉장히 어둡게 찍히게 된다. 빛이 드리워지는 부분만 보이다시피 할 정도인데 이런 점이 공사현장의 거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보통의 공사현장은 다른 이들보다 일찍 시작하고 조금 일찍 마무리를 한다. 새벽같이 나오셨던 분들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난 후에 땀으로 가득 찬 안전모를 벗고 임시 세면대에서 간단히 세수 정도만 하신다. 그리고 현장 구석에 가셔서 땀에 젖은 작업복을 벗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신다. 깔끔하게 갈아입으시고 중절모까지 쓰셨다면, 다 같이 모이셔서 이런저런 말씀들을 하시며 담배들을 태우신다. 하루의 마지막 인사도 서로 큰소리로 나누시고 쿨하게 각자의 갈길을 가신다. "내일 보자고!"




중절모 반장님.




사진을 찍는다고 찍었는데 총 36컷 중에서 몇 컷이 남았다. 그 남아있던 몇 컷은 을지로에 있는 사진관에 가면서 찍게 되었다. 을지로는 공간 디자인을 시작한 이후로 참 많이 왔던 곳이다. 학동에는 진짜가 많고 을지로에는 가짜가 많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잘 모르겠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 떠나서 을지로는 없는 게 없다. 현장에서 디자인을 실현하는 과정 중에 어려움이 생기면 을지로를 찾았다. 공사 현장과 을지로는 친한 사이기 때문에 모든 게 가능했다. 을지로는 나에게 보물상자 같은 곳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재개발이니 뭐니 해서 그 모양새를 많이 잃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듯이 새로운 공간들이 을지로에 많이 생겨났다. 필름을 맡기는 사진관부터 시작해서 아름다운 카페들, 소규모의 샵들이 그렇다. 을지로의 하늘은 언제나 그랬듯 전선들이 얽히고설켜있다. 일조권이라는 건 무시한 채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은 당연하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그런 골목들이 많다. 역시나 평상시에는 이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이런 상황들도 나름대로의 매력으로 느껴졌다. 







을지로에 있는 사진관은 친구의 소개로 먼저 알게 되었다. 미국 여행을 가기 전에 필름을 산다고 해서 따라왔었다. 혼자서는 흑백사진을 맡기러 왔던 곳이다. 사진관의 이름은 망우삼림. 필름 카메라를 취미로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미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다. 가끔 고양이도 보이곤 했는데 항상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망우삼림은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숲이라는 뜻이다. 을지로 11번 출구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비가 오는 날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이라면 우산을 피지 않고서도 갈 수 있을 만큼 자리도 좋았다. 저녁이면 창밖으로 망우삼림이라는 한자가 또렷하게 보인다. 처음에 이것만 보고는 "실내포장마차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큰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항상 직원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꼭 필름을 맡기러 가지 않아도 한 번쯤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 커피나 차를 판매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사장님의 선택이고... 공간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인스타그램 팔로우도 하고 가끔 라이브 방송도 챙겨보면서 사진의 소소한 재미를 알아가기도 한다. 내 취향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더욱 추천한다.




언제나 멋진 공간을 보고 느끼는 건 이 시대의 큰 행운이지만 복합적인 요소로 점차 변하고 사라져 가는 을지로의 끝을 바라보는 마음의 한편은 아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사진으로 남기고 즐길 수밖에.




이 시계 깨졌다고 한 것 같았는데... 구하기 힘든 빈티지 시계다.




필름 판매 박스와 필름 보관대. 지금은 위치가 조금 바뀌어 있다.




망우삼림 :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숲





누가 사진관 고양이 아니랄까 봐 포즈 제대로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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