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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signer MYO Sep 23. 2018

day 16. 악몽의 트레이닝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인종 평등에 관한 교육

어제 2시부터 5시, 그리고 오늘과 내일 아침 8시 30분부터 5시까지 3일에 걸쳐 인종 평등에 대한 트레이닝에 참석하기로 했다.


대체 어떻게 트레이닝을 한다는 건지 의문이 많았지만, 이미 지난 2주 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도 생각했지만, 인종 차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나와 알시노, 안젤리카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자리가 되길 바라며 아침 일찍 트레이닝 장소로 향했다.


첫째 날

오늘은 그들이 조사한 데이터에 대한 결과를 듣는 자리였다. 발표자는 우리 조직은 한 가지 사건이 아닌, 이 나라를 관통하는 전체 시스템에 대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고(그렇지, 나무가 아니라 산을 봐야지. 동감이다.) 그 방향에 따라 연구를 진행했다고 했다. 그리고 결과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는 설명을 시작으로 다양한 차트가 가득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발표는 주택, 건강, 교육, 경제, 음식, 교통 등의 카테고리 별로, 흑인, 백인, 다른 인종들, 이렇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다시 구분해서 항목별 데이터를 보여주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어라? 흑인, 백인, 다른 인종들..?

분명 시작 전에 분명 인종 평등에 대한 트레이닝 코스라고 하지 않았나?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명확한 수치로 보여주는 것은 좋으나 계속 인종을 구분하면서 '흑인들은 차별받고 있어!'라는 메시지만 강조하는 그들의 발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라? 잘못된 그래프가 보인다.

전혀 다른 내용을 3개씩 한 그룹으로 묶고 하나의 라인 차트로 표현했다. 데이터의 특성상 하나의 라인 차트로 표현할 수 없는 수 없는 자료였지만, 그래. 한 번쯤 실수할 수도 있지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들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라? 그래프와 전혀 다른 설명을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한 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졌는데, 제대로 답변을 하지 않고 급하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거나 질문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기 일쑤였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님이 어떤 기준으로 산출한 거냐고 물으니 지금까지 제 얘기를 잘 들으신 게 맞느냔다. (일동 깜놀..)


잘못 표현한 그래프에,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발표자의 거듭되는 실수에 신뢰도는 떨어져 갔다. 무엇보다 '데이터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인종 차별이 문제야.'라는 그들의 발표 덕분에 없던 편견도 생길 것 같아 지쳐갈 때쯤 오늘의 코스는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알시노, 안젤리카는 오늘의 트레이닝에 열변을 토했지만, 그래도 내일은 토론식으로 진행된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잘 들어보자며 내일 아침 일찍 만날 것을 약속하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둘째 날

8시 반부터 시작되는 트레이닝에 가려면 6시 반에는 일어나야겠구나 하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들기 직전에 한국에서 온 문자를 보고 기상 알람 시간을 5시로 바꿨다. 새벽부터 약간의 문제가 생긴 프로젝트의 영상을 확인하고 메일을 쓰며 정신없이 일하다가 트레이닝 장소로 향했다.


오늘은 2명의 트레이너와 1명의 인턴 트레이너, 그리고 5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둥글게 자리 배치해놓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래, 오늘은 참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 다음 섹션이 시작되었다.

간단한 게임으로 편견을 깨기 미션을 달성하고, 트레이너는 질문을 하고 참석자들은 대답을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몇 개의 질문이 이어진 후,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참석한 사람들의 대답을 들으며 보드에 쓰기 시작했다. 그의 다음 질문은 '금요일 저녁 5시 한 여성이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에서 계산하려고 서 있는데, 지갑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녀 뒤로 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고 가정했을 때, 이 여성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누군가의 첫 번째 답변은 '그 여성은 흑인일 것이다.'

그 뒤로 남편이 없을 것이다. 돈을 없을 것이다 등의 답변이 이어졌다.


이후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고, 대부분의 질문엔 그들이 원하는 답이 있어 보였다. 편견을 깨려는 시도인 것은 알겠으나 이게 정말 도움이 되긴 하는지 알 길이 없는 상태로 오전 코스가 끝나갈 무렵, 알시노가 질문을 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질문은 듣지 못했다.) 그랬더니 한 책의 제목과 저자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 책을 보란다. (베스트셀러인데, 안 봤니? 뭐 이런 느낌의 말투로!)  


인턴이라는 친구의 태도는 더 가관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때,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본인은 귀에 이상이 있는지 잘 안 들린단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 크게 말씀해주실래요? 아니면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래요?' 하면 될 것을.(오전 내내 이 말을 대체 몇 번을 들었는지!)


결론적으로 참석한 사람들의 깊은 생각이나 경험은 하나도 듣지 못하고, 시종일관 그들의 주장만 강요받은 채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 식사 이후, 잠시 쉬는 시간에 메일을 확인해보니 한국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작은 문제가 생겨 확인을 위해 집에 가야만 했다. (사실 더 있고 싶지도 않았다..) 


알시노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본인도 미팅이 있어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이 우버를 타고 일단 집으로 가기로 했다. 알시노는 내가 짐을 챙기는 동안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온다며 트레이너에게 갔는데(트레이닝이 시작할 때, 자리를 비우게 되면 꼭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둘의 대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거다.


가까이 갔더니 진행자 왈. 지금 가면 내일은 올 수 없단다. 오후에 진행할 트레이닝은 미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에 관한 중요한 섹션이 준비되어 있어서 이걸 놓치면 내일 우리는 따라올 수가 없다는 거다. 알시노는 그래도 우리는 내일 와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며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건만, 다음에 처음부터 3일을 다시 들으라는 거다.(하..)  알시노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으나 우리는 11월 말에 여기를 떠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갑자기 룸에 있던 다른 로컬 아티스트 말라즈를 부르러 간다. (이때부터 내일은 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말라즈에게 너도 가야 하느냔다. 그 친구는 황당한 얼굴을 한 채(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얼굴) 자신은 오늘은 계속 있지만 내일 오전에는 대학에서 수업이 있는 날이라 끝나고 올 예정이라고 했더니, 학교 수업이 맨날 있는 것도 아닌데 바꿀 수 없느냔다. (뭐라고..?) 


이후 더 말도 안 되는 대화가 이어지고, 알시노는 오늘 우리가 놓치는 부분은 말라즈에게 설명을 듣고 그녀가 놓친 부분은 우리가 설명을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더니, 트레이너 왈. 넌 정말 머리가 정말 좋은 것 같으니 여기서 너의 아이디어를 파는 게 좋겠단다. 그러면 부자가 될 거라며. (What?? 코스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알겠으나, 그는 이미 선을 넘었기에 여기서부턴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나는 우버가 왔으니 이만 떠나자고 했다.


나오는 길에 미팅 후 돌아오던 안젤리카를 만났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자기도 우리랑 같이 돌아가고 싶지만, 트레이너와 다시 오기로 약속을 했다며 걱정을 한 움큼 안고 터덜터덜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와서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소파에 앉았는데, 마지막에 나눴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던 모양인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사건을 어떻게 정리할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기에 일단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안젤리카에게 문자가 왔다.


자기는 내일 트레이닝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며, 이미 CNP의 에리카에도 문자를 보냈다며 캡처 본을 보내주었다. (문자만 봐도 화가 있는 대로 난 알젤리카 얼굴이 상상되었다.) 같이 문자를 받은 알시노는 이미 미팅 가는 길에 에리카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단다. 그 문자까지 확인을 하고 나니 말라즈는 아까 자기가 불려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 전화가 왔다. 통화를 끝내고 나니 안젤리카가 문을 두드린다.


그녀는 우리가 나온 이후에 트레이닝은 더 가관이었다며 있던 일들을 설명해주는데, 가라앉던 화가 다시 올라왔다. (너무 길고 어이가 없어서 여기에는 생략하겠다.) 우리는 내가 만든 매콤한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나눠 먹으면 열변을 토했는데, 식사가 끝나자 안젤리카 묻는다.


- 우리 나갈래? 난 술이 필요해. 잠이 안 올 것 같아.

- 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난 시원한 맥주가 필요해.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은 알시노에게 연락해서 바(bar)에서 만난 셋은, 오늘 있던 트레이닝의 문제와 우리의 의견을 취합하고 내일 에리카와 만나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악몽 같았던 트레이닝 대해 욕도 실컷 하면서 스트레스를 모두 풀고 나니 12시를 훌쩍 넘었다. 너무 길고 힘든 하루였는데, 이런 날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무엇보다 우리 셋의 의견이 같아 너무 다행이다!




다음 날 아침. 우리 셋과 에리카는 우리 집에 모여 이 트레이닝은 인종 평등은 커녕 인종을 더 분리하고, 없던 편견도 만들어 내는 것 같아 굉장히 불편했다는 의견을 전했고, 나는 만약 우리처럼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 이 교육을 받는다고 상상하면 미래가 걱정될 정도로 위험한 트레이닝인 것 같다는 의견을 더했다.


더불어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말과 상황을 전하며, 그들의 무례한 태도는 우리가 인종 차별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런 방식의 트레이닝보다는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우리의 설명을 들은 에리카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전했고, 이 부분을 꼭 주최 측에 전달하는 것은 물론, 이후의 트레이닝에 대해서도 관계자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자리를 갖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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